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모든 것은 법정에서 판명될 것입니다!” 유서대필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된 강기훈씨가 검찰로 자진출두하면서 말했습니다. 24년 동안 그는 결백했으나, 법정은 24년이 지나서야 그의 결백을 판명했습니다.

24년의 세월은 강기훈씨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건전한 상식과 양심’을 갖고 있는 평범한 시민에게 그 시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사회가 그 시간을 통해 얻어야 하고, 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강기훈씨의 과거와 현재의 고통은 우리 모두의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사회 모습을 무겁게 묻습니다.

올해 제5회 진실의힘 인권상은 강기훈씨로 선정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동시대의 역사’가 된 그의 고통과, ‘역사적 개인’으로 승화된 그의 실존을 함께 기억하고 가슴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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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시위를 하던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의 집단구타로 사망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시작된 1987년 6월항쟁 이후, 더 이상 학생들의 죽음은 없을 것이라 믿었던 시민들은 분노했고, 또다시 거리로 나섰습니다. 민주화된 나라에서 발생한 또래친구의 처참한 죽음에 대학생들은 연이은 분신자살로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5월 8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분신을 했습니다.

이 때 등장한 검찰은 김기설씨의 유서를 전민련 동료 강기훈이 써줬다고 주장합니다. 언론들은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비판하던 민주화 진영은 동료의 자살마저 부추기는 ‘부도덕한 죽음의 배후’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정국은 반전됩니다.

이례적으로 조직폭력배를 주로 수사하는 서울지검 강력부가 배후세력을 규명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서울지검 강력부가 강기훈을 지목한 순간,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검찰은 ‘무죄추정’이 아닌 ‘유죄단정’이라는 심증만으로, 잠도 재우지 않은 채, 영혼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모욕 가득한 욕설과 구타, 협박으로 수사를 했습니다. 어떤 증거도, 어떤 언어도, 어떤 진실과 양심도 검찰의 ‘단정’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검찰은 강기훈을 기소했습니다. “강기훈은 1991년 4.27.경부터 같은 해 5. 8.까지 사이의 일자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 한국신학대학 리포트 용지에 검정색 사인펜으로 김기설 명의의 유서 2매를 작성”(검찰 공소장, 1991년 7월21일)했다는 것입니다. ‘자살방조죄’였습니다. 범죄 일시와 장소도 특정 못한 기소였습니다.

대필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김기설(망자)은 1982년경 경기 파주 광탄 소재 00종합고등학교 1년을 중퇴한 학력의 소유자로,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함에도 피고인(강기훈)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망자는 유서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시절 김기설 또는 강기훈과 함께 했던 이들이 주고받았던 편지와 문서를 증거로 제출했습니다만, 법원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씨의 감정만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죄까지 추가되었고,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거짓의 카르텔은 강했습니다. 항소심과 상고심이 진행되었지만, 기각 당했습니다. “검찰이 정권의 하수인이 아닌 명실상부한 국민의 공복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재판에, 저는 피고인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설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던 강기훈씨가 겪어야 했던 시대와 인간에 대한 좌절과 참담함은 우리 모두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기를 함께 건너왔던 동시대 사람들의 충격과 상처도 컸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자유, 평등, 인간애, 생명, 권리, 여성 등 사람다운 가치의 성장이 ‘유서대필조작사건’을 계기로 일거에 뒷걸음치는 상황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키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국가권력의 행태가 사실은 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깨달아야 했습니다.

강기훈씨는 “하루하루가 용납할 수 없는 시간”을 무려 1,151일, 3년 1개월 23일 꼬박 채우고 풀려났습니다. 감옥살이 내내 굳건히 곁을 지켜줬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고, 아들딸도 낳았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노력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순간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을 흔드는 과거의 기억들은 지나간 일이 아닌 현재였으며, 눈을 뜨고 경험하는 가위눌림이거나 악몽 그 자체, 1991년 기억들은 이승을 뜨지 못하는 망령처럼 떠돌면서 제 삶을 압박했습니다.” (2014년 1월16일, 재심 최후진술)

그는 눈을 뜬 채로, 맨 몸으로 고통스런 기억을 견디고 견뎠습니다. 사법시험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유서대필사건 대법원 판결문으로 자살방조 사건의 판례를 공부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병이 날 정도로 화가 나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암이 발병하고, 재발하고, 그래서 죽음의 공포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절망과 쓸쓸함의 깊은 밑바닥에서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증언했습니다. 24년 전 ‘증언자’가 되겠다고 했던 다짐과 희망을 기억하면서 재심을 이어왔습니다. “수사했던 검사들과 검찰 조직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검찰이 만든 대필 시나리오를 진실이라고 손들어준 법원”의 잘못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고통과 싸우며 부조리에 맞서왔습니다. 자신에 대한 재심이 아니라, 사법부와 검찰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재심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진실의 힘 인권상 심사위원회>가 강기훈씨로 결정한 첫 번째 이유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그가 조직적이고 총체적인 국가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맨 몸으로 맞서며 24년을 버텨왔다는 그 사실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스런 삶과 진실을 향한 투쟁을 통해 권력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냈고, 또 증언했습니다.

강기훈씨로 결정한 두 번째 이유는, 24년의 세월을 건너온 지금 또 다른 ‘죽임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사법부, 정부, 지식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강기훈씨는 대법원에서 재심 확정판결이 난 이후, “저를 끝으로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책임을 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강기훈씨를 죽음의 배후세력으로 몰았던 검찰과 법원을 비롯하여, 그에 동조하며 강기훈을 ‘악마’로 몰아부쳤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 그들은 ‘죽임의 굿판’을 벌인 자들입니다.

당시 검찰은 강기훈을 두고 “교활한 인물”이라며 “이 사회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최고 권력 집행기관의 자격으로 이런 ‘악마’를 응징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재심 재판에서 검찰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시되 피고인이 전대협 노트, 낙서장을 조작하는 등 관련 증거를 조작하여 국민과 언론을 호도하여 공권력을 불신케 하는 얼마나 크나큰 잘못을 하였는지, 국민과 언론이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서울지검, 2014년)

무죄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검찰은 여전합니다.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도, 정작 그렇게 만든 이들은 단 한마디 반성이나 사과가 없습니다. “권력에 취한 인간들은 반성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 합리 정의, 그것은 궁극의 지향이기는 하지만, 영원히 가능하지 않은 꿈일 뿐”이라며 한탄했던 강기훈씨의 좌절이 오히려 이해됩니다. 활보하는 가해자의 모습은 피해자와 가족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국가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사회의 정의관념 또한 자라날 수 없습니다. 불의한 가해자가 합당한 책임을 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진정한 치유를 이루고,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집단적 안도감도 생깁니다. 용서와 정의도 그 때 자라납니다. 강기훈씨에게 가해자들과 국가의 진심어린 사죄가 너무 늦지 않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지만, 역사에 새겨진 사건은 무한합니다. 온 생애를 걸고서도 진실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만, 그들을 기록하고 기억한 ‘역사’가 있었기에 이후 세대들은 진실을 알게 됩니다. 가해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세월이 지나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가 죽고, 기억도 사라지는 날이 온다 해도, 그들이 자행한 범죄와 그것으로 취한 이득은 생생한 기록과 수치로 남을 것입니다. 유한한 실존은 무한한 역사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불의는 순간적으로는 승리하는 것 같지만, 기록과 평가를 통한 정의를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정의와 진실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난다”고 했던 젊은 강기훈씨의 믿음은 그렇게 실현될 것입니다.

강기훈씨로 결정한 세 번째 이유는 강기훈씨를 버티게 해줬던 힘, 그의 어머니와 가족, 그리고 그의 동지,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진실을 향한 용기를 함께 기리며, ‘고통을 견디게 한 힘’을 기억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제 선후배, 가족들의 삶은 하루도 ‘유서 대필’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명예롭지 못한 망자에 대한 부채감, 하루 한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저에 대한 연민, 처절하고 지옥 같았던 시간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 이 모든 게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놓았습니다.” (2014년 1월16일, 재심 최후진술)

강기훈씨가 살아온 24년의 세월에는 그의 어머니, 아내, 두 동생, 두 자녀가 함께 해왔습니다. “평생 아들 사건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어머니 권태평씨는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인권단체에서 헌신하며, 2005년에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입학도 했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어머니는 2010년 4월 아들의 무죄를 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지고, 검찰이 대법원에 항고를 한 다음이었습니다. 강기훈씨가 24년 동안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버틸 수 있었던 힘은 가족의 존재 덕분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며 더 아파한 동료들에게 이 판결이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고등법원이 무죄판결을 선고하던 날, 강기훈씨는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인사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판결을 얻어내기까지 우리는 길고 긴 치욕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며 “감격보다는 비통할 뿐”이라고 말한 전민련의 동료들은 죽음을 부추기는 검은 세력으로, 고 김기설씨는 죽음을 배후조정당한 꼭두각시로 매도당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긴 세월을 전민련 동료들은 진실을 반드시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헤쳐 왔습니다. 오랜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무엇보다, 전민련 인권위원장으로서 강기훈 김기설, 두 후배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사건을 가까이서 함께 겪었던 서준식씨를 기억합니다. 강기훈 재판 내내 보안관찰을 핑계로 감옥에 갇힌 그는 출소하자 곧 백서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염규홍씨가 그 길에 함께 했고, 결국 3권 2,700여쪽 분량의 <유서사건 총자료집>이 탄생했습니다. 유서대필조작사건의 처음과 끝, 거짓과 진실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강기훈 백서’였습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진실규명 운동은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땀과 눈물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강기훈과 함께 불행하고 비통했던 한 시대를 함께 살아왔던 이들, 그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찾아 수고로운 길을 마다않던 이들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함께 손잡고 고통의 시간을 건너온 이들에게 <진실의 힘 인권상>이 작은 연대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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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그것이 한 사회의 정의의 척도와 인간적 품격을 결정합니다. 억울한 피해자들, 조작으로 죽어간 자들, 고통 받는 자들, 눈물 흘리는 자들, 그들을 바른 자리로 올려놓고 함께 보듬는 정도만큼 우리 사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것은 같은 공동체 성원으로서 인간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내며 진실을 밝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어두운 시대들을 밝은 햇빛 아래로 드러낼 수 있었고, 우리가 믿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강기훈씨와 가족들의 희생과 고통이 오늘과 내일을 향한 사랑과 정의, 용서와 연대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의 피눈물에 우리 사회가 응답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고통을 마중물 삼아 민주주의와 인권사회로 만들어가려는 우리의 걸음을 쉬지 않겠습니다.

고통스런 시간을 견뎌내고,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강기훈씨, 고맙습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