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의진 문경 민간인 집단학살 생존자 ∙ 정희상 시사IN 기자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 공동수상자로 결정!

재단법인 진실의힘(이사장 박동운)은 매년 6월 26일 유엔이 정한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United Nations Day in Support of Victims of Torture)'을 기념합니다. 특히 <진실의힘 인권상>을 시상하여 고문과 국가폭력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고문의 재발방지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과 광란의 한 시대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는 채의진 ‘문경 석달동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 생존자와 4.19 이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 한 정희상 시사IN 탐사보도 전문 기자입니다.
문경 석달동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은 1949년 12월 24일 정오, 공비 토벌 명목으로 수색정찰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소대원 70여명이 문경군 산북면 산간 마을인 석달동을 지나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남녀노소 마을 주민 86명을 불러내 학살한 반인륜적 범죄입니다. 희생자 중 41명이 여성이었으며, 22명은 10세 이하의 어린이였습니다. 당시 13세의 채의진 선생은 형의 시신에 가려져 집단학살의 구덩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 형, 형수, 누나… 아홉 명의 가족이 이유도 알 수 없는 국군의 총탄에 사라졌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참혹한 학살을 은폐했습니다. 10년이 지난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비로소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채의진 선생도 관계당국과 언론에 호소했고, 국회 조사단은 1960년 6월 3일 석달동에 현장조사를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밝히는 이들을 반국가행위자들로 처벌했습니다. 채의진 선생도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채의진 선생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의 참혹한 역사를 대변합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폭력적으로 전개되면서 군과 경찰은 물론 그들과 연계된 우익단체들도 조직적으로 가담해서 ‘좌익’으로 간주된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어떤 절차도, 근거도 필요 없었습니다. ‘좌익’, ‘부역’이라는 추상적인 딱지만 붙이면 죽여도 되는 광란의 시절이었습니다. 1948년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에 이어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직후 국민보도연맹원 수십만명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전쟁 중에는 노근리 사건 등 미군에 의한 학살도 일어났습니다. 적게는 20만명에서 100만명(4.19당시 피학살유족회 집계)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추정할 수 조차 없는 많은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유족들은 유해를 수습하기는커녕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고 싶어도 제삿날을 알 수 없었고, 죽은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국가는 진상규명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고, 은폐했으며 오히려 탄압했습니다. 1960년 전국적으로 피학살자 유족들이 벌였던 학살 진상규명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4.19혁명 직후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됩니다. 진상규명과 유골발굴, 책임자 처벌, 경찰의 감시 중지 등을 요구한 유족들의 기세에 의해 국회도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상황은 반전되고 말았습니다.

망각의 뿌리에 맞서 진실의 등불을 든 채의진의 삶
1961년 5월 17일 박정희 지시를 받은 육군방첩부대는 대대적인 예비검속을 단행하여 4천여 명을 체포했는데, 유족회 간부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군부는 유족회 활동이 ‘북한 괴뢰의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라고 규정했으며, 피학살자 조사 명부, 유골발굴일지와 수집철, 유족회원 명단, 고발장 등 진상규명의 단서가 될만한 자료는 남김없이 압수하여 폐기했습니다. 심지어 희생자들의 유골을 안장한 합동묘를 파헤쳐 유골을 화장해버리고 위령비를 깨뜨려 땅에 파묻기도 했습니다. 부관참시, 제2의 학살이라 할 만했습니다. 이 같은 탄압을 거치면서 민간인 학살은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고, 유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채의진 선생도 그랬습니다. 선생은 초, 중,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학살의 현장은 시도 때도 없이 눈에, 마음에 펼쳐졌습니다. 미칠 것 같은 억울함과 답답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고향 산에 올랐고, 나무뿌리와 나뭇가지를 골라와 서각공예를 시작했습니다. 1987년, 21년간의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서각공예에 본격적으로 매진합니다.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내 인생. 그래서 나는 밤잠도 끼니도 잊은 채 망치로 조각도를 두들기기 일쑤였다”고 회상합니다. 86명의 석달동 원혼들이 묻혀 있는 산에서 주워온 돌, 나뭇가지는 선생의 손에서 다시 생명을 찾았습니다. 솟대, 지팡이, 조각상으로 변한 작품들은 선생의 삶을 지탱해주었습니다.
1989년, 정희상 <말>지 기자를 만나고 나서부터 선생의 삶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실을 보도하려는 언론매체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이 선생의 삶을 학살 진실규명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진상규명을 해낼 그날까지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지 않겠노라 다짐합니다. 채의진 선생은 모든 정부기관에 청원하고 진실을 요구합니다. 국회의원 전원과 국회에 수 차례 탄원서를 보내고 청원했습니다. 거절당하면 또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노력에 힘입어 활동가, 교수, 유족들이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2000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 위원회(범국민위)’ 출범으로 이어졌습니다.
2005년 5월 31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9월 7일, 범국민위 창립 5주년 기념식에서 선생은 17년간 기른 머리를 자릅니다. 12월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했으며, 2007년 6월 26일 문경 석달동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 진실규명이 결정됩니다. 아홉 명의 가족을 학살로 잃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사회문제로 제기하고, 법적, 제도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채의진 선생은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그 고통을 딛고 진실규명을 위해 온 삶을 거리에서 살며 헌신했습니다.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암울한 역사를 증언한 시대의 증언자, 목격자인 채의진 선생은 끈질긴 투쟁으로 미흡하나마 국가의 사과를 이끌어냈습니다. 국가는 채의진, 그리고 ‘수많은 채의진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짓밟고, 망각 속에 가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학살의 구덩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죽음 같은 고통을 딛고, 끔찍하고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맞서 ‘진실’이라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삶 전체를 통해 인간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진실을 보여줬습니다. 심사위원회가 채의진 선생을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채의진 선생에게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드림으로써 철저한 망각의 공동체 안에서 외롭게 싸웠던 채의진 선생의 삶을 동시대와 함께 기억하려고 합니다.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통틀어 국가의 차디찬 외면과 시민의 망각을 낱낱이 기록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가 채의진 선생의 투쟁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삶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진실의힘 인권상을 드립니다.

정희상, 419혁명 이후 망각을 일깨운 첫발자국,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 보도
월간 <말>지 기자로 일하던 정희상 기자는 1989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집중 탐사해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석달동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취재하던 중 채의진 선생을 만났고, 보도 후 전국 각지에서 제보된 민간인 학살 사건을 2년 동안 취재합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최초로 민간인 학살문제를 제기한 그의 보도는 1990년대 각 지역 신문 및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추적보도와 역사, 사회과학계의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전국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취재한 그의 보도는 수십 년의 망각을 일깨운 연구와 보도의 첫 발자국이 되었습니다.
정희상 기자는 <시사저널>, <시사IN>으로 옮긴 후에도 대한 취재를 이어갑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를 뒤져 문경, 함평, 제주 4.3 학살 사건 등의 진실을 추가 보도하며 인권 아젠다로 삼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전국에 방치된 채 흩어진 피학살자 유골 수습 및 합당한 처리 문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규명된 민간인 학살 사건들의 피해 배보상 문제 등도 지속적으로 보도했습니다. 망각에 뿌리내린 사건을 햇빛으로 끌어올리고, 존재하지 않은 비국민 취급을 당한 피학살자들의 죽음에 국가가 책임 있는 사과를 하기까지 정희상 기자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온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금기’를 파헤치는 길은 험난했고, 인정하는 일은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노력으로 우리 사회는 한걸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아무도 피해자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 유골들이 버려진 방방곡곡을 돌며 유족들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정성껏 보도한 점을 기억합니다. 그의 끈질긴 보도와 책으로 많은 학자, 언론인, 운동가들이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에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망각을 강요당한 공동체와 피해자들이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의 큰 공로입니다. 국가 권력이 잊으라고 강요했고, 대부분의 언론이 귀를 막고 있던 그 시기에, 피해자들의 곁에서 함께 듣고, 보고, 보도해온 정희상 기자에게 진실의힘 인권상을 드립니다.
아직도 땅 속에 있는 유골들의 통렬한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를 결정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기간 동안 학살당하고 아직 발굴되지 못한 채 누워있는 유골, 발굴되었어도 제대로 안치되지 못한 채 컨테이너 박스에 머물러 있는 유골들이 상징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주목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즐겨 찾는 아름다운 산과 바다에는 우리가 묵념해야 할 학살의 장소가 많습니다. 땅 아래 묻힌 채 누구의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유골들은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라는 통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진실의힘 인권상이 아주 작은 진혼곡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름도 채 갖지 못한 채 죽어간 ‘박아기’, ‘김아기’ 들을 포함하여 학살 피해자들, 죽음의 구덩이에서 살아남아 진실의 역사를 증언하고 복원해온 유족들, 그리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삶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여온 활동가, 언론인, 교수, 법조인들의 끝없는 투쟁에 경의와 존경을 보냅니다.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사회가 이들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단원고 박수현 아버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목소리!
이 날은 한국의 수많은 고문과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함께 합니다. 올해는 단원고등학교 박수현 학생 아버지 박종대 씨,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 씨 등 국가폭력 피해자와 가족들이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이루는 근본’인 진실에 대한 권리와 재활의 권리,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유엔총회(UN General Assembly)는 1984년 12월 10일 고문방지협약을 채택했고, 대한민국은 1995년 이를 비준했습니다. 고문방지협약 제14조는 고문피해자가 구제받을 권리와 국가의 의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에 근거하여 협약 비준국이 갖는 피해자 구제 의무를 특별히 강조해 온 유엔은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과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의 피해자를 위한 구제조치와 손해배상에 관한 기본원칙과 지침(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협약 제14조에 대한 가입국들의 실행을 촉구하는 일반논평(General Comment)을 채택했으며, 유엔 인권이사회는 ‘고문 및 기타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굴욕적인 처우 및 처벌에 있어서 고문피해자의 재활’ 이라는 결의문(Resolution)을 채택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권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회복은 ‘원상회복, 손해배상, 재활, 만족, 재발방지의 보증’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함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영역에서 피해자 중심의 접근방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문방지협약을 비준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인 대한민국은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재활에 대한 국제적 움직임에 전혀 발맞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문을 근절하기 위한 법적 조치는 2016년, 지금도 여전히 미력하며, 고문피해자의 구제와 재활을 위한 노력은 오히려 더 인색해졌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상황이 후퇴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날 울려 퍼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외롭지 않도록, 잊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더 큰 함성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낸 인권피해자에게 존경을 표하고, 고문과 국가폭력에는 대항의 목소리를 높이는 오늘, 연대와 지지의 힘이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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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힘 인권상 소개
(재) 진실의힘은 ‘6.26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을 맞아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고문과 국가폭력의 생존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인권상을 만들었습니다.
2011년 첫 수상자는 서승 (71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19년 복역), 제2회 수상자는 김근태, 제3회 수상자는 고문피해자들을 위한 인권변론의 길을 걸어온 홍성우 변호사, 제4회 수상자는 버마(미얀마)의 최장기 양심수 우윈틴 선생과 한타와디 우윈틴 재단U Win Tin and Hanthawaddy U Win Tin Foundation 입니다. 제5회 인권상은 강기훈 씨로 선정되었습니다. <제6회 진실의힘 인권상 심사위원회>는 심사위원장으로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심사위원으로 김선주 (언론인), 권인숙 (명지대), 김정인 (춘천교대), 박명림 (연세대), 이삼성 (한림대) 교수와 강용주, 박미옥, 조용환 진실의힘 이사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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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 소개
1997년 12월, 유엔총회는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6월 26일을 고문생존자 지원의 날(United Nations Day in Support of Victims of Torture)로 선포하고 1998년 6월 26일 첫 번째 기념행사를 열었습니다. 코피 아난 당시 UN 사무총장은 “오늘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 역설하며 “이토록 잔악한 현상에 좀 더 주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코피아난의 호소에 호응하여 수많은 나라, 조직들이 고문피해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문 방지 세계 최대 조직인 국제고문피해자재활센터(IRCT)는 2016년 6.26의 주제를 ‘고문,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Support Life After Toture)로 정했습니다. 오늘 이 시각, 세계 140여 나라에서는 고문생존자들의 삶을 지원하자는 하나의 목소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울려 퍼지도록 행동하고 있습니다.  
(재)진실의힘은 그 목소리에 화답하며, 이미 100여개 이상의 나라가 고문방지협약을 비준했고, 수많은 나라들이 법적으로 고문을 금지했지만, 고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단 하루만이라도 고문생존자들을 기억하고 지원하는 일에 온전히 바치기를 희망합니다. 고문과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 받는 세상을 함께 만들고자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