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우리가 놓친 사람들

│채효정
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
ⓒ경향신문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 마음에 날이 서서 동네 고양이들 밥 주는 일도 예전 같지 않게 눈치가 보이곤 한다. 바이러스 감염자, 전파자의 낙인이 의심자로까지 번지는 추세다. 그러면 다른 많은 존재들도 함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감염의 역학적 경로는 은폐되었던 존재를 드러내고, 그들을 병리학의 법정과 의심과 혐오의 여론 법정에 세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할 때 나는 병원에서 입원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입원 기간에 도와줄 간병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유가 조선족 출신 간병인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이 거부되거나 병원에서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간병인 수가 갑자기 줄었던 것이다. 나의 '병실여사' - 병원에서 배운 호칭. 그곳에선 병원 노동자들이 서로를 청소여사, 배식여사, 병실여사 등으로 불렀다 -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 간병인들은 ‘어디를 돌아다니고 누구를 만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병원에서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가지 않고 이어서 간병 일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아마 그분들이 일하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병노동자도 바이러스 감염이 무섭긴 마찬가지다. “이번 참에 좀 쉬시면 어때요?” 하고 물으니 간병여사는 “자식들은 쉬라고 하는데...”하며 말을 멈췄다. 일을 중단해도, 이자는 쉬지 않는다. 월세도 쉬지 않고 돌아온다. 어떤 재난 상황에서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로 외출 자제령이 내려도, 사람 많은 곳을 피하라고 해도, 나처럼 병원을 계속 다녀야 사람들이 있고, 거기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생각한다. 

청소여사는 일이 두 배로 늘었다. 화장실 청소는 소독이 강화되었고 비닐만 바꾸던 휴지통도 박스까지 함께 폐기하라는 방침이 내려와 매번 박스 접는 일까지 추가되었다. 병실 청소도 마찬가지다. 출입문과 문고리까지 소독약으로 닦아야 했다. 노동 강도는 높아졌지만 그만큼 인원이 추가되거나 보수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마스크는 병원 정규직 직원들에게만 지급되었다. 간병여사도, 청소여사도, 마스크는 모두 알아서 구해야 했다. 최일선에서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의료진뿐만이 아닌데, 투명했던 노동자들은 안전 보호에서도 투명인간이다.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닥치고 그래서 누구도 개인적으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병은 가난한 사람들부터 먼저 낚아채 갔다. 대남병원이 그렇고 신천지가 그렇다. 시골 마을에는 누가 신천지에 빠져 재산 날리고, 누구네 집도 풍비박산 깨졌다더라 하는 소문들이 많다. 들여다보면 다들 딱한 사정이 있다. 신천지를 사이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욕하기 전에 먼저, 왜 사람들이 정치가 아니라 종교를 찾고,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이나 시민단체가 아니라 교회 문을 먼저 두드리는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문턱이 높은 정당이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정말 내세우는 이념만큼, 정당의 구성원들도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되고 추방당한 이들의 정치적 결사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번 선거에서 극우정당들이 얼마나 약진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비례대표 득표에서 기독자유민주당이 녹색당을 두 배 이상 앞섰다. 

지금 국면이 선거와 분리될 수 없는 비상사태이고, 코로나19에 이미 중요한 정치적 의제들이 총집약 되어 있는데도 정당들은 계속 선거 일정과 표 계산에만 함몰되어 있다. 대중의 위기감을 정치가 이렇게 못 따라가면 계속 사이비 교주들에게 시민을 신도로 빼앗길 수밖에 없다. 돌볼 사람이 없는 이들을 사설 의료기관의 폐쇄병동에 맡겨야 하는 이 문제부터 적극 나서서 제기하면 좋겠다. 청도 대남병원에 대한 집단 격리(코호트) 방침이 진행되는 동안 세월호처럼 위태롭게 지상에 떠 있는 병원을 보는 일이 너무나 괴로웠다. 동료 시민의 죽음 앞에 다시는 무기력한 목격자가 되고 싶진 않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시선이 오랫동안 놓쳐온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진보정치와 사회운동은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놓쳐서 미안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