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운(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12·3 비상계엄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환상에 가까웠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이후 각양각색의 응원봉과 깃발들로 상징되는 역동적인 광장정치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현시하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 광장의 열기와 사회대개혁을 향한 목소리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광장 이후 우리가 마주한 것은 서부지법 폭동 사태로 예비되었던 극우정치의 전면적 부상이다.

극우 자체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극우적인 것’은 건국 초기부터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로서 존속해왔다. 그렇지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주도 세력과 계엄을 정당화했던 국민의힘, 곧 극우 엘리트 정치세력에 의한 ‘위에서부터의’ 극우정치와, 서부지법 폭동과 탄핵 반대 집회로부터 대표되는 ‘아래로부터의’ 극우정치가 마주치며 일으킨 불길이다. 기실 극우 문제는 이러한 ‘위’와 ‘아래’의 수직적 유비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극우 개신교, 극우 유튜브, 극우화된 청년 세대 등, 극우정치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노조나 사회 복지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과 같은 형태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교묘히 작동하고 있다. 이른바 극우 정치 및 정동의 일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극우 정치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기는커녕, 일상화되어 교묘하게 작동하는 극우정치에 대해 어떻게 투쟁의 구도와 전략을 잡아가야 할지조차 헤매고 있는 형국이다. 윤석열의 탄핵이 곧바로 극우적인 것의 ‘청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윤석열과 계엄은 극우정치의 ‘원인’이 아니라 그 기반에서 배태된 ‘결과’라는 것을 뼈아프게 실감케 하는 계엄 이후의 정세이다.

이번에 진실의 힘과 「전후 극우의 트랜스내셔널 재영토화」 공동연구팀이 기획한 〈극우의 부상, 민주주의의 미래〉 연속강좌가 유독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2026년 5월 13일부터 8월 26일까지 총 8회에 걸쳐 21세기 극우 정치의 재편과 민주주의 위기를 분석하고 미래를 조망한다는 기획은 현 정세에 대한 시의적절한 응답처럼 느껴졌다. 첫 강의는 기조강연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 오랫동안 파시즘 문제를 연구해 오신 김용우 선생님께서는 이후 강연을 듣는 데 필요한 ‘지도’를 그려주셨다. 선생님의 강연 전체를 관통했던 것은 현 극우를 파시즘이라는 렌즈로 보는 것이 적절하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위해 강연 내용을 경유해보자. 파시즘은 “민족의 유기체적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민족의 재생 혹은 민족이 쇠락한 상태에서 부활한다는 전망에 대한 광적인 헌신”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Roger Griffin, Fascism(2000)) 파시즘은 민족을 위협하는 ‘병균’들을 지목하고, 이들을 절멸함으로써 민족이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상정한다. 이때 파시즘의 폭력은 일종의 ‘창조적 파괴’로서 정당화된다. 그리고 파시즘적 지향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간형, 이른바 ‘호모 파시스투스’의 발명을 시도한다. 다음으로 연사께서는 카스 무데의 논의를 참조하여 극우의 분류를 제시한다. 극우파(Far Right)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부정하는데, 그럼에도 민주주의 체제는 인정하는 경우에는 급진우파(Radical Right)로, 민주주의 체제까지도 부정하는 경우에는 극단우파(Extreme Right)로 분류된다.

그런데 현대의 극우정치는 과거 무솔리니나 히틀러의 ‘역사적 파시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 위에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 디지털 혁명, 인류세의 위기가 바로 그것인데, 세 문제는 물론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연동되어 작동하지만 그중 가장 근본적인 심급으로서 문제시되는 것은 단연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각기 상이한 맥락에서 사용되는데, 연사께서는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논의하셨다. 우선 경제 정책으로서 신자유주의이다. 시장의 자유를 위한 탈규제, 민영화, 감세, 노조의 약화, 복지정책 후퇴 등으로 계열화되는 일군의 정책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일종의 관점(현실을 보는 렌즈)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이다. 모든 것의 경제화, 자기 자신의 기업화, 공동체의 파괴 등에 이르는,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주체화의 차원이 있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요구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는(insulate) 경제외적(메타경제적) 프레임으로서 신자유주의이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학자인 하이에크는 민주주의적 통치가 사회 정의에 대한 ‘무제한적 요구’를 통해 시장 질서를 침해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이에크는 행위자들의 자유에 기반한 시장 질서가 평등에 대한 요구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며,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민주주의의 제약도 용인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민주주의적 통치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격리하는(encase) 프레임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몫을 축소하고 정치를 경제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이고 중대한 위협이 된다.

이제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와보자. 현대의 극우를 파시즘이라는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가? 우선 현대의 극우는 파시즘의 본 정의처럼 유기체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속 주체들은 스스로를 기업가적 주체로서 간주하여 자신의 가치를 제고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원자화된 개인이다. 극우 집회에 나온 2030남성들이 소수자들을 자신의 몫을 빼앗아 가는 ‘병균’으로 혐오하고 궁극적으로 절멸시키려는 것은 맞지만, 이들의 동기는 민족에 대한 광적인 헌신보다는 ‘공정’에 대한 왜곡된 믿음에 기반한다. 극우의 혐오 정치는 유기체로서 민족의 갱신을 추구하는 ‘창조적 파괴’보다는, 뚜렷한 비전을 결여한 채 자신의 불만을 배출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밖에도 현대의 극우를 파시즘으로 부르기를 주저하게 되는 이유는 많다.

그럼에도 연사께서는 현대 극우를 이해하는 데 파시즘 개념이 적절한지 아닌지 확답을 내리진 않으셨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명명 자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현재 민주주의에 대한 극우정치의 공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냐는 문제이다. 때로는 파시즘이나 혹은 새로 발명된 신종 파시즘, 후기 자본주의 파시즘, 신자유주의 파시즘 등의 개념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해당 개념이 당면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여부이다. 필자는 현재 12·3 이후 탄핵찬성집회의 시민자유발언을 연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윤석열을 비롯한 내란 세력을 ‘파시스트’, ‘파쇼 무리’ 등으로 부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이 분노를 반영한 멸칭 그 이상의 쓸모를 갖기 위해서는 도리어 그 개념이라는 도구 자체에 천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극우에 대한 정확하고도 다층적인 이해를 통해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광장에서 표출된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과 열망이 더 힘 있게 멀리 뻗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차적 과제이다.

앞으로 있을 일곱 번의 강연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한국 우파의 역사, 냉전 이후 청년 극우의 계보, 기억과 극우정치, 극우의 헤게모니 전략, 극우 정치의 새로운 기술적 인프라, 글로벌 극우 등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앞으로의 강연들은 극우에 대한 깊이 있고 폭넓은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함께 오래 연구를 해온 저자들일지라도 극우에 대한 정의나 방법론적 관점 등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 차이의 간섭 속에서 극우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증폭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뜻깊은 기획을 마련해 준 진실의 힘과 파시즘 연구팀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