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올여름부터 고려대학교 인권센터를 통해 진실의 힘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장혜선, 허나연입니다. 저희는 지난 4개월간 오주석 선생님의 간첩 조작 사건을 정리하면서 관련 문서 스캔하기, 자료 읽기, 주목할 만한 부분 찾아보기 등의 활동을 진행해왔습니다. 특히 저희는 당시 사회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서 이 사건을 다음 세대에게 알려야 할 이유을 고민했는데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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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는 조금도 내 나라를 배반한 간첩은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장님.”

(송석민 탄원서 中 / 1983. 8.19)

1983년 춘천 중앙시장에서 소매유통업을 하던 오주석 선생님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오주석, 송석민, 김성규, 김종주, 안교도 선생님이 간첩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북한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재일동포 김문자 부부와 만나거나 편지를 했다는 것이 기소 이유였다. 1980년 일본 출장을 가게된 오 선생님은 먼 친척이던 재일동포 김문자 부부를 만나 식사를 함께 했을 뿐, 간첩 행위를 한 것은 전혀 없었다. 없는 죄를 주장하려니 당연히, 증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고문과 폭력, 조작과 왜곡이 이어졌다.

“각목으로 사정없이 온 전신을 패기 시작하니 각목이 부러져 나가고 정신 잃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의사의 치료(를) 매일 받아가면서 계속 고문을 가했습니다.”

- 김성규 선생님의 상고이유서 中

“얼굴을 때리고 발로 하체를 차고, 물을 먹이고, 전기고문, … 소위 통닭 구이 등을 받았습니다. … 고문과 구타 등으로 계속 많은 하혈과 빈혈 등으로 기진맥진하고…”

- 송석민 선생님의 진실화해위원회 진술서 中

나라를 팔아먹은 간첩이라는 누명은 2010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확정되며 벗겨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한 듯하다. 20대인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록할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이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 뒤의 폭력

사건 기록을 직접 읽어보면서 놀랐던 것은 선생님들의 혐의를 뒷받침한다는 증거들이 선생님들과 김문자 부부의 대화 내용처럼, 거의 전적으로 선생님들의 자백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객관적인 사실이라 할 만한 것은 특정 지역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역 주민이라면 자연히 알게 되는 정보이지 특별히 탐지한 국가 기밀이라기엔 무리가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정보들이 비자발적인 자백과 함께 엮여 증거로 채택되었다. 당시 수사기록에서도 선생님들이 불법 감금된 동안 수집된 정보라는 것이 증명됐는데 증거가 되다니 어이가 없다. 게다가 이 증거들은 ─근래의 재심 및 진화위 조사에서 인정된 바와 같이─ 고문 및 폭행을 동원하여 수집된 것이다. 우리는 사건 기록을 읽는 내내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의 실태에 몸서리가 쳐졌다. .

이렇게 명징한 고문 및 폭행 사실에 대하여 선생님들은 딱 한번 ‘없었다’고 답변한 적이 있다. 바로 1심 형사재판의 1차 공판에서인데, 처음에는 이것이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곧 이 재판이 안기부 및 검찰 조사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날의 조서에는 변호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충분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서를 쓰라’는 협박이나 ‘말을 잘 들으면 풀어주겠다’는 회유, 폭행과 고문으로 강압적인 수사를 받았으니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을까? 그런 상태에서 그와 같은 진술을 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모순적으로 보였던 상황이 역으로 국가폭력의 존재를 여실히 반증하는 듯했다. 오주석 선생님 간첩조작 사건은, 그와 같은 국가폭력이 만들어낸 우리의 역사다.

폭력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죄책감 내지 부채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건 다른 곳도 아닌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이 땅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감정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우연히 박동운, 임봉택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의 만남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직접 만나 뵌 선생님들은 정말이지 ‘살아가는’ 사람들이셨다. 나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이분들의 유머와 재치, 견고함 등을 엿볼 수 있었고, 그건 당신들께서 과거에 속박되시기보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쉼 없이 걸어오셨기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사실 이것은 내가 진실의 힘에서 줄곧 어렴풋이 느껴온 것이기도 했다.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는 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날의 나를 탓하기보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오주석 선생님의 사건을 정리하고 이와 같이 기록하는 것은 그러한 일의 일환이다.

혹자는 왜 하필 기록하는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꽤 오랫동안 고민해왔는데,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과거와 현재는 결코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는 노점의 강제철거에 맞서다 의문사하신 이덕인 열사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열사의 변사체가 발견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였다. 그의 부모님은 지난 3월 진화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지만 8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 국가폭력은 비단 독재 정권 치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해결해야 할 국가폭력 사태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기록하는 일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이고, 저항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폭력과 그에 맞서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볼 수 있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오주석 선생님 사건을 통해 나는 과거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알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과거를 온전히 과거로만 남겨둘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활동을 마무리하고 나는 또다시 나아갈 것이다. 이곳, 진실의 힘에서.

- 장혜선 활동 소감

국가폭력을 바라보는 오늘의 나

국가는 선량한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우리 국민들은 그 의무에 기대어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나 마땅히 국민을 지키는데 쓰일 줄 알았던 국가의 공권력이 자신을 향할 때 억울함보다 더 큰 감정은 배신감이 아닐까? . 4개월간 오주석 선생님 등 간첩조작 사건의 자료를 정리하며 말도 안 되는 증거 날조와 위조로부터 선생님들이 느끼시는 억울함을 함께 느꼈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이 모든 게 국민들이 신뢰하던 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구속영장 없이 이루어진 안기부의 감금과 문답식 진술 구조, 고문으로부터 나온 허위 진술 등은 개인의 씻을 수 없는 아픔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오명이다. 따라서 국가는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정중한 사과와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 역사가 국가에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는 계속 꺼내고 펼쳐내어 잊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고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적어도 국가폭력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며 국가는 더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개월 동안 자료 정리를 하는 시간들은 내게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분노와 억울함에서 출발하였고 다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활자 너머로의 이해와 공감뿐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활동을 마쳐갈 즈음에는 선생님들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긴 시간을 조금이라도 같이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더 나아가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해 교과서적인 이해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시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나의 변화가 가장 큰 성장이 아닐까 싶다.

- 허나연 활동 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