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경계는 늘 어둡습니다. 공공(公共)과 복리(福利)를 앞세운 권력, 그리고 선의(善意)를 가장한 인간은 자주 위험했습니다. 그 본질이 폭력과 탐욕이므로, 어느 때는 서로 한 몸뚱이가 되어 개인의 삶과 영혼을 무참히 파괴하고 짓밟습니다. 놀라울 것도 없이, 거악(巨惡)의 은신처는 어둠이 아니라 빛입니다. 떠들썩한 공공복리이며 위장된 선의(善意)입니다. 그리하여 백주(白晝) 대낮에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버린 자들이 도처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더라도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국가가,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이 주범이고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재단법인 진실의힘(이사장 박동운)은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인 한종선씨를 선정했습니다.

한종선씨는 아홉 살 소년이던 1984년 어느 날 12살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강제수용되었다가, 1987년 폐원과 함께 퇴소했습니다. 부산 소재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씨가 1960년 설립한 자립시설 ‘형제육아원’이 모태가 되어, 장기간 부산시와 국고의 지원을 받은 사회복지법인입니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 7월 25일,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보호사업 위탁계약’을 맺고 부랑인들을 본격 수용합니다. 같은 해 12월 15일 내무부는 훈령 제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발령합니다. 복지시설에 ‘수용, 보호’ 등에 관한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박인근과 형제복지원은 이 권한을 이용해, 도시미관, 범죄예방, 부랑인 선도라는 명목아래 장애인, 고아, 길거리에서 잠든 사람, 술 취한 시민, 아동들까지 불법 납치해 강제 수용했습니다.

국가기관은 사실상 공모했습니다. 1986년 전체 수용자 3,975명 중 경찰이 수용을 의뢰한 인원은 3,117명, 구청이 의뢰한 인원은 258명으로 집계됐습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경찰과 구청의 실적 올리기, 그리고 복지시설이 국고 지원을 받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소년 한종선이 형제복지원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것은 인간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수용자들은 군대식 체제로 편성되어 하루 10시간씩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폭력은 일상이었으며, 성폭행이 만연했고, 저항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면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구타당하다가 죽은 이들도 다수였습니다. 

1987년. 원생들의 집단탈출을 계기로 형제복지원의 충격적인 인권유린 실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리 조사단 일행은 한마디로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왜 이제 왔느냐’, ‘제발 살려달라’, ‘제발 집으로 가게 해 달라’는 호소를 들으며 그들의 주거상태, 식생활, 끔찍스런 가혹행위의 진상들이 생경한 나라의 얘기처럼 눈앞에서 전개될 때, 그것은 경악이었고 분노였고 인간적 허무였다. 그곳은 법의 사각지대이며, 인간 매립장이었고, 부랑아 복지원이 아니라 부랑아 양성소였으며, 이러한 법의 사각지대가 근 1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왔다는 면에서, 시・구청이나 검・경찰의 지도・감독의 유기와 방치, 방조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타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형제복지원사건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 1987년 2월 4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사건의 진실은 세상에 온전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0여 년간 최소 513명(신민당 보고서)이 사망했으나 검·경당국은 그 원인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고, 국가행정기관의 방조와 공모에 대한 책임도 묻지도 않았습니다. 박인근에 대한 형사처벌 역시 단지 횡령죄만 인정되어 징역 2년 6개월에 그쳤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산 형제복지원사건은 그 악명만이 흉흉한 소문처럼 떠돕니다. 무심한 세월 속에서,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시설에 끌려가 강제노역과 폭행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른 이들은 지금 원혼이 됐습니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이들은 그 지옥같은 시간을 치유받거나 보상받지 못한 채 다시 세상에 버려졌습니다.

한종선씨는 ‘복지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구두공, 배달원, 날품팔이 노동자, 전단지 알바, 뱃일 등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힘들게 아버지 누나를 수소문해 25년 만에 재회했으나, 그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국가와 형제복지원이 일가족에게 안긴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습니다.

2007년. 그는 더 이상 세상 속에 숨지 않기로 결심하고 형제복지원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를 시작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다시 착취당하고 학대받아야 했던 야만의 공간이었고, 인권의 사각지대였습니다. 그는 인터넷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고, 악몽같은 기억을 그림으로 그려 알렸으며, 세상각지에 흩어진 피해생존자들을 찾아 <부산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을 꾸렸습니다. 그 끔찍한 야만의 공간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과 수많은 피해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용기 있는 행동들이 ‘범죄공간 형제복지원’을 시간의 어둠속에서 다시금 호출해 내고 있습니다.

많은 국가폭력사건들이 그러하듯 진실은 쉬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국가는 자신의 범죄를 쉬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중도 쉬이 잊습니다. 시간이 흘러 피해자들은 다시 범주화 되고 대상화됩니다. 또 다른 폭력입니다. 그리하여 진상규명에서부터 피해배상 그리고 치유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은 지난하고 고통은 오랫동안 피해자의 몫이 됩니다.

그 동안 한종선씨를 중심으로 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은, 국회 앞 농성, 1인 시위, 서명운동, 토론회, 국회 공청회, 증언대회, 삭발, 단식농성, 노숙농성, 부산형제복지원 터에서 청와대까지 국토 도보행진 등 진상규명을 위한 치열하고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심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가 어둠에 묻혀 있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난 10년간 보여준 끈질긴 노력과 삶의 자세에 대해 동시대인으로서 깊은 연민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한종선씨는 자신이 겪은 야만적 폭력과 고통스런 삶에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 진실을 향한 고단한 싸움에 앞장서 왔습니다. 또한 자신을 단지 개인피해자의 영역에 가두지 않고, 또 다른 국가폭력피해자들을 향해 손 내밀고 함께하는 연대를 통해 활동가이자 치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실에 직면하고자 하는 그의 무한한 용기, 그리고 피해자임에도 타인의 고통까지 함께 껴안고자 하는 끝없는 인간애에서 우리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발견합니다.

한종선, 그는 상처입은 치유자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씨와 최승우씨는 지금 수개월 째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중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피해당사자들이 진상규명을 앞장서서 말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반인권적 실태, 국가의 책임, 피해자가 겪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은 몇 년 째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과거 정부와 달리, 촛불시민의 힘에 기대어 탄생한 새로운 정부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훨씬 무거운 역사적 책임감을 갖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제8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을 계기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되어 여전히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는 사건의 진실들이 밝혀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피해생존자들이 거리에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 모아 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2018년 6월 26일

진실의힘 인권상 심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