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열린 특강 "김재형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의 시설사회 진단"에 참여한 자원활동가 배성윤 학생의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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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윤(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시설사회=‘정상/비정상’ 판별의 연속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사회를 표현한다면 ‘어떠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회를 규정하는 시도는 다양합니다. 김재형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를 ‘시설사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김재형 교수의 연구는 역사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근대 한국 사회에서 만연했던 ‘수용’의 모습을 포착하고 이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 병리를 ‘시설사회’라는 언어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시설사회란, 시설이 자연스럽고, 시설을 요구하고, 시설과 같은 사회라고 정의됩니다.

최근 탈시설을 위한 장애인들의 투쟁과 코로나19에 대항하는 사회의 반응은 기저에 흐르고 있는 배제와 격리의 작동을 여실히 드러낸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근대로의 이행과 민주화가 이룩된 지금도 우리 각자는 여전히 또 다른 ‘시설’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대, 민주화와 더불어 시설사회라는 개념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설사회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국가의 보편적인 특징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에서부터 강연은 시작됩니다. 현대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교정’, ‘돌봄’, ‘치료’라는 개념은 ‘통제’의 다른 이름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규율이라는 부정을 넘어서 인센티브라는 긍정이 난무하고 있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경쟁의 장에서 탈락된 채 성과를 발휘하리라고 기대되지 않는 이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사회는 여전히 ‘수용’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한국의 역사적 맥락 하에서 광복 이후 직접적인 폭력성 명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구호와 사회/의료복지의 언어는 교묘한 사회통제의 이중체계를 낳았습니다. 즉 복지와 구호라는 법적 이상과 사회사업 체계라는 현실이 뒤얽혀 ‘합당한 통제’라는 모순된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각종 시설들을 설립했고, 형제복지원은 그 과정에서 생겨난 비극적인 시설 중 하나로서 수면 위로 떠 오르게 된 것입니다.

식민지와 고도성장기를 거친, 한국적 자본주의의 형성 과정에서 김재형 교수가 바라본 국가의 모습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인신매매국가’였습니다. 국가는 돌봄이 필요한 몸을 자본축적에 쓸모 있는 몸으로 거듭 전환하였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자활’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교육은 소수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수용자는 국가, 법인, 지역사회의 공모에 의해서 착취될 뿐이었습니다.

강연은 앞으로의 과제를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을 목표로 두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김재형 교수는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과 수용에 관한 연구가 수행될 때는 특정한 인구집단을 고립시키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설에 대한 탐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즉, 지금의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 정리와 함께 사회복지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시설과 탈시설 사회로의 전환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설사회의 메스꺼움

개인적인 소감으로 형제복지원과 관련한 자원활동을 한 이후에 이 강연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접하면서 느낀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하고 거북한 감정들이 교수님의 강연을 통해 명쾌히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불현듯 스친 섬뜩한 느낌은 내가 시설 밖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도 일종은 시설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시설사회가 끔찍한 까닭은, 그런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에 대한 수용이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언제나 그 기준은 임의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수님이 강연 중 말씀하신 시설의 역설을 곱씹게 됩니다. 사회가 자의적으로 쓸모의 기준을 정하고,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낙인 찍고, 그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것은 자체가 오히려 비용이 발생하는 꼴이 됩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비용을 들여서까지 격리하고 싶은 집단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했고, 일상의 많은 순간에서 평범한 얼굴을 하고 깊숙이 침투한 여러 배제와 고립, 그리고 격리가 떠올라 무서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