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광장을 잇는 윤퇴청 대표/불평등 물어가는 범 청년행동 공동대표)

우리의 광장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에서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선고까지, 123일 동안 한국 사회는 윤석열 탄핵을 두고 극렬히 대립했다. 빈센트 베빈스의 『광장의 역설』(진실의힘)은 이러한 대규모 시위가 한국만의 특수한 풍경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책의 원제는 “If we burn”. 책은 우리가 ‘타오른 이후의 이야기’와 ‘타오른 이후의 질문과 그 해답’을 담고 있다. 전자는 2010년대 이후 전 세계적 양상인 대규모 시위의 기록이고, 후자는 그토록 뜨겁게 타올랐는데도 사회변혁을 이루지 못한 이유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그 끝에 저자가 도달한 해답, ‘대표성’에 대한 사유다. 책은 독자를 브라질, 칠레, 이집트, 미국, 홍콩 등 뜨겁고 치열했던 정치적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거대한 시위의 주체들이 무엇을 했고, 무슨 고민 끝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세밀히 따라간다. 그 과정은 ‘나였다면 어떻게?’, ‘한국은 왜?’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전 세계 시위를 통해 한국의 광장을 곱씹기

책 속 끝없는 시위의 서사는 역자도 후기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세계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게’ 한다. “우리도 그랬는데”하는 공감에서 출발해, 한국의 광장을 세계의 맥락 속에 위치 짓는 경험은 사회적으로 흩어진 광장을 다시 곱씹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아랍의 봄 시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광장의 비공식 대변인’들이 있었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계엄 이후 트위터에서 광장의 소식을 퍼뜨리던 ‘에스텔 뉴스계정’과 ‘향연’을 떠올렸다. 홍콩 청년들이 집회 후 쓰레기를 직접 줍는 장면에선 여의도 집회 후 시민들과 함께 청소하던 기억이 겹쳐 보였다. 브라질 무상대중교통운동이 SNS 이벤트 공지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은, 윤퇴청이 트위터에 ‘내란동조 국민의힘 장례식’을 제안해 평일 낮 200여 명이 모였던 날을 떠올리게 했다. 누가, 어떻게 대표성을 가질 것인가를 두고 여러 국가의 시위대가 벌인 논쟁은,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대표자 회의에서 흐르는 긴장감을 연상케 했다.

윤석열 탄핵 광장을 주의 깊게 지켜본 시민이라면, 책이 다루는 신자유주의, 반정치, 소셜네트워크, 시민과 정치권력 간의 긴장, 수평주의와 대표성 같은 키워드를 통해 한국의 현재를 세계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분석해보게 될 것이다.

광장 이후, 대표성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책은 2010년대 대규모 시위를 취재하며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끝에 ‘대표성’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대부분의 대규모 시위가 탈권위주의와 수평적 문화를 내세우며 대표성을 거부했지만, 이는 결국 정치적 힘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자들은 대변될 것이다”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대표성’은 무엇일까. 저자는 2019년 칠레의 ‘사회폭발(Estallido Social)’을 대표성의 모범사례로 든다. 당시 하원의원이던 학생운동가 출신 가브리엘 보리치는 시위 후 2021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물론 광장의 시민들은 그가 권위적으로 굴며 거리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그의 집권 그 자체가 광장이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대표성이란 정치적 권력의 획득, 즉 선출직 당선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다. 광장을 상징하는 인물이 당선되면 대표성이 완성되는 걸까? 그 상징성은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부여하는가? 하나의 정당이나 조직으로 결집해야만 성공인가, 혹은 권력을 압박할 협상력이 있으면 되는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 저자의 논리로 본다면, 윤석열 탄핵을 이끌어낸 한국의 광장은 분명 승리다. 탄핵 이후 탄핵에 우호적인 정당 후보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마음 편히 승리라고 규정하기에는 여전히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한국은 1987년 제6공화국 헌법 제정 이후 대통령 탄핵 논의만 세 번째, 그리고 박근혜와 윤석열 두 대통령은 실제로 파면됐다. 박근혜 탄핵 당시에는 국민적 합의가 비교적 높았지만, 이번엔 반대세력의 결집으로 정치적 대치가 극단화됐다. 그 사이 전 세계적인 경제적·정치적 양극화의 심화와 민주주의 후퇴라는 국제적 맥락과 반공냉전 체제에 기반한 한국의 극우정치가 맞물려 한국형 극우는 조직적으로 강화되었고, 국민의 힘은 탄핵 이후에도 반성 없이 ‘윤어게인’을 외치며 정치 선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래를 위한 구조 개혁과 소수자 의제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이런 현실에서 광장의 시민들이 집권 중심의 ‘대표성’에만 목멜 순 없는 노릇이다. 내란청산과 개헌은 여전히 불안하며,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평등을 기반으로 했던 광장의 요구와 달리 ‘차별금지 법제화’는 요원해 보인다. 여당이 시민사회와 약속한 ‘독립적 시민사회위원회 설치’나 ‘숙의민주주의 기구 설치’, ‘민주시민교육지원법 제정’ 등도 아직 미지수다. 탄핵 광장의 주역이었던 장애인·성소수자·여성·빈민 등의 광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그들을 대변할 정치적 공간은 여전히 협소하다. 이들에게 스스로 조직해 대표성을 획득하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광장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극심한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시민들이 사회운동과 밀도 높게 결합했다는 점에서 이번 탄핵 광장은 이전과 달랐다. 운동권을 거부하던 대학생·청년들이 시민단체와 연대했고, 깃발을 직접 만들어 대오들과 나란히 섰으며, 가로막힌 시위대의 길을 열어준 민주노총에 환대를 보냈다. 농민들의 트랙터를 지키기 위해 남태령의 밤을 지새운 이들도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대표성’만큼이나 의미있는 가능성 아닐까. 광장 안에서 타인과 연대하며 거리의 정치를 만들어낸 무수한 움직임과 역동을 해석하고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운동의 동력이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을 때 금세 소모된다는 저자의 우려에 충분히 동의한다. 나 역시 최근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다. 하지만 대규모 시위에 모였던 수백만 시민들의 의견을 한두 명의 정치적 대표가 대변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며 적합하지도 않다. 저자가 우수사례로 언급한 칠레 역시 보리치 대통령이 추진한 개헌이 무산되며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음을 상기해야 한다.

광장이 흩어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운동을 이어갈 동력일지 모른다. 여전히 목표와 전략, 전술을 고민하며 광장을 이어가려는 이들이 있다. 올해 9월 열린 기후정의행진은 ‘광장을 잇는 기후정의행진’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그 속에서 광장의 경험과 시민들의 참여가 다시 빛났다. 당장 분명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광장은 분명한 경험과 사람을 남긴다. 이를 동력 삼아 더 넓고 단단한 연대를 상상하고 조직하는 것, 그 안에서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되 분명한 운동의 목표와 전략을 기획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넘어설 무기가 아닐까. 앞으로 우리의 광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각자가 품은 질문의 답을 <『광장의 역설>』과 함께 찾아보길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