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이-맘풀이04 <박춘환>

●2011년 2월 22일(화) 저녁7시  

● 진행 문요한

마이데이 세번째 날인 2011년 2월 22일. 연건동 진실의힘 사무실은 이미 점심 때부터 시끌벅적해집니다. 개야도에서 나고 자라 열다섯살 부터 배를 탔던 어부, '오늘의 주인공' 박춘환 선생은 밤샘 경비근무를 끝내고 막바로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형한테서 단 한차례도 속 마음을 들어보지 못했던 동생 춘식 선생은 형이 주인공이 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그럼, 나도 가야지 따라나섰습니다. 5형제 가운데 남동생 둘이 왔고 오지 못한 동생은 부인을 파견(?) 하셨더군요. 바로 아래 동생은 술한잔 하고 싶어도 동네 사람들이 피해버려서 오랫동안 말을 잃고 지냈다는 이야기를, 제수씨는 당장 이혼하라는 친정의 반대에도 꿋꿋하게 가정을 지켰으나 지금도 친정집 왕래를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막내동생은 일곱 살 때 형이 끌려간 일을 당하면서 직접 목격했던 이야기를... 어제 일인 듯, 오늘 일인 듯 그렇게 쏟아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반가이 맞이한 사람은 다름아닌 아들 박상열이었습니다.

상열씨가 백일도 채 되기 전, 박춘환 선생은 핏덩이 아들과 부인을 남겨둔채 끌려갔습니다. 몸조리도 제대로 못했을 젊은 아내는, 시시때때로 간첩이 준 물건을 찾는다며 집에 들이닥친 형사들 때문에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홀로 남겨진 아이는 할머니의 등에 업혀 동네 아줌마들이 물려준 젖으로 자라났습니다. 아이는 잘도 자라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었지요. 하지만 엄마 아빠는 미처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채 큰 일을 당하고 말았으니, 상열이는 존재하였으나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은 아이였습니다. 결국 상열이는 작은 아버지 박춘식 선생의 아들로 올려진 뒤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답니다. 아버지 고문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는 상열씨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박춘환 선생의 날>은 다른 무엇도 필요없더군요. 그저, 박춘환 선생과 가족들이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시간을 잘 견뎌내신 것에 마음 깊은 박수를 보내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니까요.

자리에 함께하여 마이데이-맘풀이 시간을 멋지게 완성해나가는 우리 선생님들의 소감도 참 가슴을 울렸습니다.

김태룡 선생은, "가족들이 많이 오셔가지고, 서로 이해하면서 사는게 너무 부럽고 존경스런 맘이 든다"고 하시더군요. "행복이 부족하면 내가 한차라도 실어다주고 싶다"고요. 선생은 "영혼이 병든 우리가 진실의힘이 생겨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을 풀게 된다"며 감격에 겨워하시네요. 삼척에서 오신 진창식 선생은 "우리 가족들은 서로 상처가 될까봐 서로 말을 안하고 사는데..." 하면서 역시 부러워하셨어요. 25년전 보안사에 끌려가서 이틀째 되는 날이라는 김양기 선생은 속에서 확 올라온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무죄 나온 판결문... 보면서도 그렇게 허망할 수 없다, 이를 악물고 견뎌온 결과물이 종이 한 장에 끝나면 내 인생은, 내 젊음은 어디로 갔나..."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가 있을 텐데, 그런 거 한번 느껴보지도 못하고..." 행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신가 봅니다. 김장호 선생은 "우리가 용기를 갖고 살아야한다"며, "누굴 죽이고 누굴 가해하고 미워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방향을 바꾸어서 내가 풍부하게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시더군요.

은혜공동체 젊은 친구는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당한 선생님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 외로움과 고통에 희망을 가져다 드리고 싶다"면서 멋진 선생님들에게 계속 지지를 보내드린다고 하더군요.

세번째를 맞이한 마이데이는 할 때마다 다른 빛깔, 다른 향기의 꽃을 피워냅니다.

고난의 시간을 견뎌낸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강인함과 용기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듣기 위해 모여 앉는 이들은 회를 거듭할 수록 귀가 커지고 열린다는 느낌을 받는답니다. 오늘의 주인공이 되신 이가, "오늘은 나의 날이다, 바로 내가 주인공이다" 는 생각을 단 하루라도 하신다면, 우리의 <마이데이-맘풀이>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여기에 조금 옮겨 봅니다.

세상에 두 번 태어난 거 같아요

문요한 : 오늘이 세번 째 맘풀이 시간인데요. 영어로 맘 free해서 ‘마음이 자유롭다’는 의미가 있고요, 우리말로 맘이 풀어지는 그런 뜻도 있다고 생각되는 데요. 몸이 충격을 받으면 근육이 뭉치잖아요. 마음도 똑 같다고 생각해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오면 마음도 뭉치고 쉽게 말하면 응어리가 지는 거죠. 어떤 응어리는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고 아무는 그런 상처도 있을 것이고요, 어떤 상처는 커서 시간이 지나도 전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몸과 마음속에 저장되어서 그 때의 시간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그런 상처도 있는 것 같아요. 고문 간첩 조작 충격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충격이고 고통이고 상처이지요. 다른 상처들, 강간을 당했다든지, 재난을 당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로나 지지를 받잖아요. 그런데 이런 간첩조작, 고문 사건들은, 어느 누구한테도 심지어 가족들한테도 마음을 열어놓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이중의 고통에 살아오신 거여서, 그 응어리들이 30년, 40년 전의 일이지만, 바로 어제 겪으셨던 일처럼 생생하게 마음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지요. 근육이 뭉치면 맛사지도 해주고 풀어주는 게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그걸 혼자 마음속에 가둬두셨다면 오늘 이 자리는 그런 마음이 풀어질 수 있는 자리였으면 좋겠구요.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때 겪으셨던 사건이나 상황을 설명하시기보다는 그때 그런 상황들 속에서 힘드셨던 속심정, 그 마음 그 감정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만큼은 내보이시길 바랍니다. 여기 앉아계시는 분들은 마음 속으로 그 응어리를, 마음을 만져준다는 느낌으로 같이 깊이 있게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아내, 홀로 남겨진 돌 지난 아들

문요한 : 박선생님이 고문당하시면서 이가 좀 상하셨구요.

박춘환 : 지금 제가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도 여기를 투드려 맞아가지고. 그래서 제가 말소리가 더듬해요. 왜 그런고 하니 참 우리 여기 형님들도 다 당해봤지만은, 이거 꼭 무슨 전투기 조종사 투구쓰는 거 있잖아요. 그거 쓰고서 전기고문을 당했기때미 내가 세(혀)가 좀 어드레해요. 내가 말하는 소리를 좀, 이해허시고 들으세요.

문요한 : 오늘 올라오시면서 어떤 얘기를 좀 하시고 싶으셨어요? 꼭 좀 하시고 싶은 얘기, 그 얘기부터 시작을 할까요?

박춘환 : 제가 첫째,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가지고, 형제간도 많고 학교라는 건 문턱도 못가고, 어려서부터 내가 선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68년도 연평도에서 조기 잡다가 납북이 됐어요. 이북서 한 4개월 있다 와가지고, 바로 집으로 온 것도 아니고 군산경찰서 가서 한 달 동안 조사 받고 8개월 살고 나왔습니다. 그 후로 72년에 다시 또 경찰서에 끌려가 가지고 참, 억울한 누명을 써서, 간첩죄를 써감서 한 60일 동안 감금시켜놓고, 낮에는 여관 갖다 쳐 박어놓고, 꼭 밤에만 데려가다 뚜드려 패기 아니면 고문 시키고, 그 짓을 한 50일 내지 가까이 했으니, 그 때만 해도 제가 25살이었기에 젊었으니께 살아왔지, 한 40대에만 그랬어도, 살아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가족들한테도 이렇게 깊은 얘기를 안했습니다.

문요한 : 아 그러셨어요. 어떤 마음 때문에 얘기를 못하셨나요?

박춘환 : 저 땜이 동생들도 참, 죄책감이 많이 들고, 저 땜이 고생도 많이 하고 그런데 차마 참 내가 경찰서에서 그렇게 당했다는 소리를 동생들에게 못하겠더라구요. 하여튼 별놈의 고문을 다 당해봤습니다. 심지어 도살장에 가면 개 돼지 아니 소 돼지 묶어가지고 꺼꾸로 매달아놓잖아요. 한 시간 동안 발을 묶어 거꾸로 천장에 매달아놨어요. 한 시간 동안은 제가 기억을 합니다. 나중에 깨서 보니까 얼굴이 이렇게 붓고 그때 당시 눈에서 피가 나대요. 그런 얘기를 동생들한테도 하지 안했습니다. 그렇게 당했다는 것을. 투드려 패는 건 보통이고, 지금도 허리꺼정 구부러져가지고. 한 60일 동안 밤이면 지하실에다 쳐박아놓고 투드려 패고 고문하고, 오죽하면 거서 내가 죽으려고 했는데 죽을래야 죽을 틈도 안줘요. 지금 참 나만 당한 게 아니라 여기 형제분들도 다 당하셨지만... 제가 젤로 지금 한 가지 안스러운 것은 그렇게 조작돼가지고 간첩으로 몰아넣고 징역살이 하는 동안 얘(아들 상열) 돌도 안 지났을 때입니다. 그걸 놔두고 내가 교도소에 갔는데, 교도소 안에서 1년 동안 면회도 안 시켜줬어요. 우리 어머니는 내 얼굴이라도 한 번 볼려고 교도소 문 앞에 계셨는데,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친구(임봉택)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어요. 근데 1년도 넘어지고 그러니까 그때서 면회를 시키더라구요. 어느 날 왔는디, 어머니가 얘를 델꼬 왔더라구요. 그때 얘네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걸 알았어요. 왜 죽었는고 하니, 경찰들이 밤중에 와서 그냥 막 집을 뒤지고 니네 신랑 이북서 갖고 온 거 내놓으라고 몇 번 그랬던가봐요. 그때 당시 심장마비로 죽고, 지금 참 동생이 키웠지만, 학교도 들어갈 때가 되고 저는 혼인신고도 안 돼있고 그래서 어머니하고 동생들하고 많이 키워주고 걔가 이렇게 컸는디, 여태까지 자식이지만 호적상으로는 내 자식이 아닙니다. 동생자식으로 있어요.

간첩살고 나왔다고 선원으로 써주질 않아

문요한 : 그 당시 부인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으시고 심정이 어떠셨어요?

박춘환 : 심정이이야 말 할 수 없었죠. 어머니한테 그 소리 듣고 제가 밤새 교도소에서, 그때만 해도 독방에 있었습니다. 광주서 독방생활을 했었는데 며칠을 울었나 몰라요. 눈물이란 것을 몇동이나 쏟아냈을 것입니다, 지금도 참 선생님들도 당해보셔서 알겠지만은, 동생들이나 식구들한테 경찰서에서 이렇게 당했다는 얘기를 아직 하지도 않고 응어리로만 넣고 있다가 참 이때까지 살아왔는데 그래도 참 출소해서 나오니까 동네사람들 아주 저 놈이 간첩하고 징역살고 나왔다고, 선원으로다 써주질 안혀요. 나는 참 인사라도 할려면 그 사람들 다 나만 보면 피해싸코, 오죽하면 경찰들이 항상 집 앞에 감시를 하고, 꼭 12년동안은 출소해갖고 하루 일기 쓰듯 써요. 오늘은 뭐 했다. 어제는 뭐 했다. 그걸 보름에 한번 씩 경찰서에 갖다줍니다. 집이서 어디를 가도 경찰서에다 신고를 해야혀요. 그런 생활을 12년 했는데 도저히 고향에서는 살지 못하겠더라구요. 얘하고 얘 동생하나가 또 있어요. 네 식구 충남연기로 왔습니다. 역시 거기서도 경찰 감시하고, 가자마자 객지서 왔다고 또 객지탐까지 하고, 여기서 30년 넘게 살았는데 인제는 그분들도 저의 심정을 알고 저 사람은 그렇게 안했던 사람인데, 저렇게 얌전하고 저런 사람인데 왜 저렇게 간첩을 맹글어서 저렇게 사람을 젊은 사람을 한 세대를 일생을 망쳐놨나? 그런 동네 분들도 몇 분 계시고...

문요한 : 지금은 괜찮은데 처음 연기에 가셨을 때는 어떠셨어요?

박춘환 : 처음에는 힘들고 말 할 수가 없었죠.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도 없고, 객지에 와 갖고 아직은 저 시골 지금은 그런 일 없지만은, 옛날에는 객지서 왔다면 객지탐을, 텃새를 너무 많이 합니다. 그 심정 참, 내가 이래서 이렇게 살면 뭐 하겠나? 그래도 내 마음만 가지면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나를 다 이해해주겠지 살아왔어요.

간첩 만든 사람이 원망스럽지, 동네사람 원망스럽지 안혀요

박춘환 : 참 젊은 청춘에 나이 스물다섯에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여태까지 이날 이렇게 다 늙어빠져 가지고 한을 가슴 속에 담았던 걸, 이 자리에서 풀고 싶어서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어제 야간까지 했지만 잠도 안 오더라구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동지들도 다 그런걸 지켜봤을 겁니다. 저는 인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살고 싶고, 동네 분들이나 고향 분들 이제 원망도 않습니다. 나 잡아다 투드려 패고 간첩으로 맹글어서 헌 사람들이 원망스럽지, 동네 분들이나 고향 분들 원망스럽지도 안혀요. 꼭 취조한 사람들이, 형사들이 열세명인가 되요. 다 죽었어요. 거기서 나와 가지고 나 당했던 놈 한 놈이라도 만나면 내가 죽인다고 얼마나 이를 박박 갈았는데요. 그 놈들이 첫째 나쁜 놈들이고, 그렇게 했으면 오래 살어 있어야지 왜 일찌감치 나보다 먼저 뒈졌습니까? 나를 그렇게 간첩으로 맹글고 그렇게 진급도 되고, 보상금도 타 먹고, 잘 쳐먹고 오래 살아야지 말이예요. 사람이 너무나 악하게 하면 제 명대로 살지를 못한다는 걸 내가 인정을 했습니다.

문요한 : 지금 안 죽고 살아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춘환 : 안 죽고 살아 있으면 말이라도 내가 복수를 하죠. 내가 그것 땜에 20대 한창 좋은 나이에.. 그때 당시에 얼마나 투드려 패는데 친구 이름을 제가 혀가지고 하필 임봉택이고 유명록씨가 걸려 들어가지고 그 때 참 나를 잡아 죽일려는 그런 마음까지 아마 갖고 있었을 겁니다. 내가 생각할 적에도...

문요한 : 어떤 심정이세요?

박춘환 : 내 속에 있는 간이라도 빼주고 싶어요.

문요한 : 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는 죄책감에..

박춘환 : 그렇죠. 그래도 나는 결혼해가지고 애까지 생기고 그랬지만 이 친구들은 그때 총각이었어요. 그 일생을 내가 망쳐놨으니 내가 얼매나 원망스럽겠습니까? 고생 많이 허고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한 그런 친구들입니다.

문요한 : 또 누가 또 고통을 가장 많이 받으신 것 같으세요?

박춘환 : 고통은 이 동생(첫째동생 박춘복)이 가장 많이 받았지요. 그리고 매형. 매형도 얼마 살지 못하고 배에서 그냥 사고로 참... 그때 당시 매형도 많이 욕 봤는데 누가 얘기를 하더라구요.

문요한 : 그런 얘기들으실 때.

박춘환 : 찢어지는 것 같지요. 나 때문에 친구나 가족들이... 이 세상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안 태어났으면 내 동생들 친구들 왜 그런 고통을 받았겠냐?

문요한 :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된다 그런 생각이 드셨군요.

박춘환 : 네. 그때만 해도 박정희가 반공법이라는 걸로 웬만한 사람들 다 잡아다 사형시키고 우리 저기 국가보안법들 그 사람들, 얼마나 박정희가 사형을 많이 시켰어요. 그때 당시, 제가 당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내가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문요한 : 나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게 힘드셨던 거네요.

박춘환 : 네 네 네... 이 자리서 이렇게 우리 친척들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니까, 이제는... 마음이 참. 동생들도 알 것입니다. (...) 어머니 살아계셨을 적이, 제가 참 자주 들려보지도 못하고 걸리는 것이... 간첩으로 들어갔다 나와 가지고, 나왔으면은, 어머니한테 좀 잘해드렸어야 했는디, 잘해드리지도 못하고, 고향에 있다가 객지로 뚝 떠나고 어머니한테 자주 가지도 못했어요. 어머니는 동생이 모시고 있었어요. 고향에 있는 어머니 보고 싶어서 한 번씩 가면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런 데를 자주 들르지도 못하고. 아마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서 좋은 거 보시고 박수쳐 주실 껍니다.

문요한 : 오늘 올라오시면서 이 얘기는 꼭 좀 해야겠다, 응어리 진 마음이 있다면 어떤 얘기가 있으신가요?

박춘환 : 살아온 고통, 표현은 참. 40년 누명 쓰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누명 다 벗었지 않습니까? 동생들하고 자식 앞에서 꼭 허고 싶은 말은 호적이고 뭐고 빨간 글씨 다 없어졌으니까 큰 소리 쳐감서 살으라는 부탁을 하고 싶고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지금도 누가 보면 80먹은 노인네라고 그래요. 형사들 생각만 하면 아주 정나미가 떨어지고 지금도 경찰서 앞이나 법원 앞이나 지나가려면 쳐다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가요. 분이 나서 그러죠.

문요한 : 과거를 떠올리면 나 자신이 좀 어떻게 느껴지세요?

박춘환 : 지금은 홀가분해요. 사는 동안 보람있게 살고 싶고 형제간들이랑. 제가 미안한 것은, 아들 여기 앉아있지만 내 앞으로 호적이 안되있어요. 내가 난 자식이지만, 낳기만 했지 키우기는 어머니하고 동생이 키웠어요. 그 핏덩이 놔두고 지어머니 죽고, 지 어머니 얼마나 보고 싶고 그러겠습니까? 얼굴도 모를 거예요. 한참 젖 빨고 그럴 때였는데...

문요한 : 고문이나 조작사건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의 냉대 무시 그런 부분들이 본인의 성격이나 인격을 좀 어떻게 변화시킨 것 같습니까?

박춘환 : 저는 마을분이나 고향분들 그 사람들 입장이라면 똑 같을꺼다. 원망하지 않고... 지금 억울하게 당해서 젊은 청춘을 다 그러고 나왔다고 위로의 말씀도 얘기해주고 그래요.

문요한 : 고문 때문에 성격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으세요?

박춘환 : 달라졌는데 지금은 또 많이 변화가 되가지고 좋아요. 한동안은 저를 적대하고 그럴 때는 안 좋았죠. 사람인들, 적대하고 그러는디 같이 저거 할려고 그랬겠어요? 그때만 해도 젊었을 때니까 저도 술 잘 먹어요. 술 한잔 먹고 나서는 우울할 때도 있고 혼자 산에 가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한참 젊은 나이 일생을 망쳐놓은 그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지금도 살아있으면 좋은데 모셔다가 밥이라도 한끼 먹이고 싶습니다. (누구요?) 나를 이렇게 간첩으로 만든 사람들. 아 그렇게 우스개 소리 한 것이죠.(모두 웃음) 한번 씩 웃어가면서 얘기해야지요. 지금은 저 누구한테 좋은 일만 하고 싶고 그 전에 가졌던 악몽을 다 벗어버리고 싶고 그래요.

박춘환 : 오늘 늦게까지 저를 위해서 오신 분들 감사드리구요. 이제는 우리 식구 똘똘 뭉쳐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끔 마음 먹고 정말로 감사만 합니다.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만 합니다. 세상에 두 번 태어난 거나 똑같아요. 열심히 잘 살고, 잘 먹고 보란 듯이 오래 좀 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요한 : 오늘 세번째 맘풀이 시간 끝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내가 저런 상황이면 나는 어땠을가? 그런 생각 하셨을텐데요. 저는 선생님처럼 잘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구요. 선생님들 말씀 한 분 한 분 들으면서, 존경스럽고 대단한 정신을 가진 분이시구나, 그런 큰 충격을 이겨내셨고,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집안이었지만 오히려 다시 또 뭉쳐있고 선생님도 그 감당하기 힘든 원한이나 죄책감이나 참담함이나 그런 심정들을 충동이나 고비가 있으셨겠지만 결국은 잘 이겨내시고 마음이 다시 회복되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훌륭하고 존경스럽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춘환 선생님과 가족들에게 힘찬 박수 보내면서 오늘 이 자리를 마감하겠습니다.

(녹취, 최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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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한마디

박춘식(동생) : 내가 형 붙잡혀 갈 당시 방위를 했어요. 나까지 잡아가서 방위 하면서 총이 몇 자루 있고 그것을 대라는 거요. 나는 절대 못 댄다. 근데 막 투드려 패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말이 나왔어요. 동네 사람들이 말을 안 걸어줘요. 내가 술한잔 살텡께 같이 먹자하면 다 피해버려요. 안되요. 그때는. 그래 갖고 그때 내가 이 동네사람들한테도 원망이 있었고, 너들 언제 나한테 술한잔 먹자고 할려나 그랬는데 지금 술 먹자 해요. 동네 사람들이 다 무시하고 할 때는 말을 못했어요. 우리 형은 교도소 가 있고, 우리 형제들은 누가 말해도 말도 안 해주고 우리 어머니가 형을 면회를 갈려고, 뭍에서, 우리 개야도 주민인디, 저 분을 집에 절대 잠 재우면 안된다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잠도 못자고, 면회도 못하고, 아는 집에서 자고 면회할려고 했는데 군산에 나와서 면회할려고, 어머니를 간첩 부모라고 안 재워줘가지고, 밤새 그냥...

박상열(아들) : 아버지가 고문당했다는 얘기를 지금 처음 들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산 밑에 살았어요. 마을 한 동네서 못 사니까. 저녁때가 되면 경찰이 오고, 감시하고 또 어머니하고 말 다툼하고 제가 도저히 못 겠더라구요. 지게 있죠. 작대기들고 쫓아가서 당신들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가라고 오지 말라고, 그래도 그 사람들 임무니까 감시해야겠죠.

중요한 건 취직이잖아요. 취직. 취직이 안 되잖아요. 취직이 안되면 뭐해요. 그냥 막노동하는 거예요. 저도 참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한탄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어렸을 때도 그랬어요. 나랑 같이 못 놀게 한 거 그런 기억들이 있어요. 지금은 세월이 지나다보니까 친구들도 저를 많이 외면시했고 지금은 그 친구도 저하고 많이 싸우고 했는데, 저도 그 집 가서 불지르고 싶고 다 죽이고 싶지요. 심정은. 그 일 때문에 셋째 작은 아버지도 밖에서 방랑생활하고 막내 작은 아버지 배타고 들어오면 조카준다고 사탕도 사오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월이 밉죠.......

김효순(제수씨) : 결혼한다고 친정에서 너무너무 반대가 심해가지고요. 옛날에는 빨갱이 집안하고 결혼하면 아주 사돈네 팔촌까지 다 취직을 못하고 어디 가서 행세를 못 한다 했어요. 수년을 고통을 당해가지고 지금도 친정을 안가요. 어느 때 친정에 가고 싶어도 대문을 못 나섰어요. 한 번 정이 난 게 그냥 쉽게 풀어지질 않아요. 그 고통을 어떻게 말 할 수 없어요. 근데 제가 부모라도 그랬을 거예요. 어느 자식을 빨갱이 집안에 주려하겠어요. 그때 시절은 너무너무 말 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도 친정은 못가요. 너무 반대를 많이 해서 상상도 못해요.

박춘성(막내동생) : 저는 일곱 살 때 큰 형님이 그렇게 되셨거든요. 그리고 좀 있다가 형수가 돌아가셨고. 그 광경을 제가 봤어요. 그리고 아버님이 제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글도 모르고 편지라도 받아보면 읽을 줄을 알아야죠. 초등하교 제가 3학년인가 그때부터 형님한테 편지를 쓰게 됐어요. 형님들이 와서 용돈주면 편지에 500원 짜리를 넣었어요. 거기 가면 큰형님이 받아서 쓸 줄 알고, 지금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구요.

*진실의힘 소식지 제5호(2011.4.5. 발행)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