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돕고 서로를 위해 싸웠던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김현우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저는 계속해서 국회를 생각했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날의 일들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자의든 혹은 타의든 생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있는 것은 미디어로 접한 그날의 ‘광경’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시민, 국회의원, 그리고 이들과 얽힌 수많은 경찰과 계엄군. 그날 그곳의 여러 움직임이 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지만, 왠지 어떤 ‘풍경’을 멀리서 그저 구경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영상에는 여러 음성 또한 담겨 있었지만, 분절된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한마디로 그곳에 있었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12월 4일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가 뜨고 사람들이 출근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전과 같을 수 없는 일상이었지만 또 그렇다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기에 더 비현실적이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인터뷰이 분들이 저에게 말씀하셨듯,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뉴스에는 여러 장면과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럴수록 더욱 의문만 커졌습니다. 대체 누구였을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밤중 나타나 그곳을 지켰다가 홀연히 사라진 수천 명,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마치 신기루 같기도 했습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던 ‘비상계엄’만큼,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도 통째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된 이러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집회에 나가는 것도 지쳐가던 3월 말, 운 좋게도 총 300명의 구술 기록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실의 힘 123내란 기록팀(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시간 참고)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날 그곳에 나갔던 47명의 시민을 만났습니다. 3개월간 각 평균 2시간, 무려 90시간 이상의 인터뷰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양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그날 그곳에 대한 증언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과 가치관 같은, 평소라면 쉽게 들을 수 없는 내밀한 경험과 마음까지 기꺼이 나누어주셨습니다. 지문처럼 고유한 삶이 매일매일 다채롭게 흘러들어오는 3개월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의 4개월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의 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외쳐도 소리가 퍼져나가지 못하는 흡음실과, 저의 목소리만 되돌아오는 반향실을 번갈아 오가는 듯한 느낌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저의 머릿속에 타인의 목소리가 강물처럼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는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배우자도 없고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 내가 죽어도 어차피 슬퍼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 나는 나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나오셨대요.
자기가 여자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시고 손을 씻고 있는데 어떤 다른 비슷한 또래 여성분이 “이제 우리는 다 늙은이고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만약에 발포하는 상황이 오면 우리 노인들이 가장 앞줄에 섭시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여성분들이 다 “그럽시다. 그럽시다.”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무엇보다도 저의 벽을 허물어뜨린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를 막지 못한, 혹은 만드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책임, “나는 안찍었다. 찍은 사람들이 책임져라.” 같은 말과는 거리가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것도 감수하고 나간 사람들은 오히려 스스로를 ‘가해자’의 자리에 가깝게 위치시킨다고 느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비상’ 상황이라며 폭력을 동원해 다른 사람들의 몫을 빼앗으면서도 스스로 피해자라고 말하는데, 역설적으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도 삶의 매순간이 ‘비상’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현장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 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자, 목소리들이 이전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분노하는 목소리, 항의하는 목소리, 흐느끼는 목소리, 호소하는 목소리, 염려하는 목소리, 환호하는 목소리, 감사를 표하는 목소리. 목소리는 흘러넘쳐 저의 벽을 무너뜨렸고, 매일같이 타인의 삶에 흠뻑 젖어 퇴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고유한 인간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낸 순간을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너무나도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개인적인 삶의 고민은 작아지다 못해 녹아서 사라진 듯 느껴졌고, 나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용기와 고유한 이야기들에 매일 소름이 돋고 눈물이 고이는, 벅차오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새로 태어났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들이 많았는데, 아마 과거와 현재의 여러 용기있는 목소리들을 만나 연결된 느낌을 말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 기록을 넘어 우리 시대의 ‘인간형’을 포착한 소중한 기록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 300명의 목소리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 것인지가 우리 123내란 기록팀의 무거운 과제입니다. 한밤중 나타나 그곳을 지켰다가 홀연히 사라진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저만 궁금했던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짧은 후기에서는 많은 이야기를 소개하진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게 됐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고 폭력적인 망상에 불과했던 ‘비상계엄’과 다르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는 전혀 비현실적이고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나타났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 항상 존재한 이들, 서로를 돕고 서로를 위해 싸우며 희생한 수많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저에게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목소리가 2024년 겨울, 국회 앞 시민들의 몸을 통해 다시 울려 퍼진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 극단적인 폭력에 맞서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 온 가장 ‘현실적’인 가치라는 것을, 권력이 아무리 탄압하고 지우려고 애써도 서로를 향한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있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12월 3일에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어땠을 것 같으세요?” 인터뷰의 공통 질문 중 하나입니다. 이에 대부분이 이렇게 대답을 시작했습니다. “저 하나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었겠지만...” 그러나 한 번 눈을 감고 생각해봅시다. 그곳에 나간 ‘모두’가 그 말을 하는 모습을. 각자의 일상을 보내던 이들이 12월 3일 10시 반 이후 위와 같은 마음으로 비상계엄 하의 국회를 향해 긴장한 모습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글을 쓰면서도 소름이 돋습니다. 사회의 모습이란 결국 그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된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씨름한 이 질문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품었던 귀한 마음과 행동의 결과 위에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간과되곤 하는 이 ‘상식’을 붙잡고 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저항마다 반복되는 이 귀한 교훈과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쉽게 잊히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데 이번 구술 기록 작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123내란 기록팀도 마지막까지 힘을 내보겠습니다. 지면을 빌어 그날 국회 앞 현장을 지켰던 모든 시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