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인권침해 기초 실태조사_ 심층 인터뷰 6

함주명, 간첩 조작 사건, 1983년

일시: 2018년 8월 28일 오전 10시 30분~12시

<함주명 간첩 조작사건 개요>

함주명은 한국전쟁 전 남한의 관할구역이던 개성에서 태어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개성상업고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함주명은 학교에 등교했다가 이미 학교를 포위한 인민군에 편입되어 그 길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참전 중에 한쪽 눈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제대를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보니 가족들은 모두 남쪽으로 피신하였고, 북한 관할이 된 고향에 외톨이로 남게 되었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함주명은 이웃에서 알고 지내던 우순학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함주명에게는 오로지 가족을 만나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 생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대남공작원을 자원했다.

1954.4.14. 휴전선을 넘어선 즉시, 자수하여 미 CIC에서 20여일간 조사를 받은 뒤, 곧 춘천경찰서로 넘겨졌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결과 가족들을 만날 목적으로 ‘위장’하여 대남공작원이 되고, 남파 즉시 자수한 것이 인정되어 춘천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고 곧바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가족을 만난 함주명은 결혼도 하고, 자녀들 양육에 힘쓰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마냥 갖은 고생을 하며 대한민국에 정착하였다. 1968년에는 중앙정보부로부터 ‘요시찰대상에서 해제되었다’는 통보를 받기도 하였다.

1983년 2월 18일,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납품하러 가던 중에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일단의 사내들에게 납치되듯이 끌려갔다. 그곳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그때로부터 함주명은 영장이 발부된 4월 4일까지 45일간 불법감금 되었고, 검찰에 송치된 4월 21일까지 63일에 걸쳐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혹독한 고문수사를 받아야 했다. 그를 고문한 이는 이근안이었다.

잔혹한 고문을 통해 함주명은 “1954년 북한에서 대남공작원으로 자원하여 남파된 후 자수한 것이 허위(위장)이며, 실제로는 그 뒤로도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면서 북한공작원과 접선하고 공작금을 수수”한 간첩이 되고 말았다.

함주명은 1회 재판에서부터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63일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잔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허위자백했고, 검찰 송치 당일에 함께 동행한 이근안의 협박으로 1회 피신조서도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우리가 300원짜리 담배를 피울 때 500원짜리 담배를 사 주고, 우리가 짜장면을 먹을 때 설렁탕을 대접하고, 우리가 바닥이나 소파에서 잠을 잘 때 침대에다 재우고 합니다” 라며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고문이 없었다’고 허위증언한 이근안의 수사기록과 이근안의 동석 하에서 이뤄진 검찰에서의 진술에 대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행해진 임의의 진술”임을 인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함주명은 16년을 복역하다가 1998년 8월 15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는 수감중이던 1993년, 그리고 이근안이 자수한 1999년 고문 고발장을 제출했다. 1999년 이근안 수사 당시 대질 조사를 통해 이근안의 고문사실을 입증했다. 그것을 계기로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했고, 2005년 7월 15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재판에서 함주명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간첩으로 조작된 지 22년만이었다.

1983년 2월,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실까요?

저는 개성사람으로 전쟁 중에 월남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대남공작원을 자원하여 남파된 1954년 4월 14일 즉시 자수해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고서 그 후 30년간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습니다. 결혼을 해서 첫째는 입대했고, 둘째는 홍익대 미술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막내는 초등학생이었어요. 그러던 중 1983년 2월 18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느닷없이 연행된 겁니다.

날짜까지 기억하시는데, 체포되던 그날 어땠나요?

잊을 수 없죠. 1983년 2월 18일 오전 9시경 기독교 방송국 내 시청각실에 용무를 마치고 나와 길을 건너는데 누군가 억지로 차에 태우곤 윗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제 머리에 뒤집어씌웠습니다. 어디로, 어떤 이유로 끌려가는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날 연행한 자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더군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고문당한 곳인데 왜 기억을 못 하겠어요. 눈을 가린 상태로 엘리베이터에 탄 것 같은데, 몇 층으로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당시 그 놈들에게는 사람 한 명 죽이는 거 간단한 일이었으니까요.

처음 끌려간 방 구조가 어땠나요?

욕조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더라고요. 내가 저 욕조에서 목욕할 일이 있을까 싶었어요.

조사실에 들어가자마자 무엇을 시키던가요?

사복을 다 갈아 입혀요. 군복은 아니었고 수감복 같은 옷으로 갈아 입힌 후 조사를 시작해요. 살아온 이야기를 다 적으라고 해서 제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를 만났는지 말하니까 느닷없이 제가 북한에서 군사정권위원회 담판요원으로 있었고 우순학이가 재북처라는 겁니다. 저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어디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저 같은 어린 사람을 요직에 채용할 일도 없다고 했어요. 그러자 우순학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따지면서 구체적으로 말하라는 겁니다. 우순학은 제가 개성에 있을 때 하숙집 딸이었고, 사춘기 시절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고 하니 그때부터 고문이 시작됐어요.

어떻게 하던가요?

마구 구타를 하는데 꼭 가슴을 계속 때려서 숨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또 빨랫방망이로 손바닥을 때려서 손바닥이 퉁퉁 부었는데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말 못 할 통증이 찾아와요. 그렇게 15일쯤 잠을 전혀 못 잤어요. 계속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책상 모서리에 강력한 백열등을 켜놓고 그 백열등을 들여다보게 해요. 그러다 졸면 빨랫방망이로 손바닥을 내려쳐요. 일주일 이상 잠을 못 잤으니 자연히 눈이 감길 수밖에요.

칠성판 잘 아시지요?

그건 다른 고문실에 있었는데요, 딱 한 사람만 누울 수 있는 판이에요. 그 위로 눕힌 후 온몸을 꼼짝 못 하게 묶어요. 다음에 얼굴에 수건을 대고 샤워 꼭지를 틉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렵고 죽을 것만 같아요.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싶어요.

물고문을 받은 후 다시 진술하는데, 이번엔 북괴 노동당에 가입했다느니, 신문 광고를 통해 간첩들끼리 알아보는 암호를 냈을 거라면서 바른대로 말하라는 겁니다. 저는 광고를 낸 적도 없고 모른다고 하니까 또 고문이 시작되는데 이번엔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수갑을 뒤로 채우고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었어요. 1분쯤 지났을까요. 그대로 기절해버렸죠. 그러니까 욕조에서 끄집어내서 이근안이 배에 올라타서 물을 빼요. 깨어나서 물을 한 양동이 이상 토하고 실신 상태에 있으면 더운 소금물을 가져다 강제로 먹여요.

다시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퉁퉁 부은 손가락을 뾰족한 볼펜 심으로 콕콕 찔러대요.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어서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김영일아 보아라 어머니 위독하니 속히 돌아오라 028”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고 허위진술 했습니다. 무엇인가 했다고 해야만 고문을 그치니 터무니없는 말을 하게 되는 거예요.

전기고문도 받으셨나요?

물고문도 참기 어려운데 이제는 양쪽 새끼발가락에는 +, - 전극을 넣어요. 그러면서 뭔가를 자꾸 묻는데 여기에 시인하면 손끝을 움직이라고 해요. 진술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다 꾸며내는 거예요. 내용을 불러주면 저는 “네네” 할 수밖에 없어요. “아니요” 하면 죽는데? 시키는 대로, 무조건 “네네” 해서 엉터리 조서가 만들어진 거죠. 그 엉터리 조서를 꾸미려고 저를 45일이나 불법 감금했어요.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 수사관들은 만난 적 있으신가요?

4월 21일 아침에 수사관들이 말하길 검사한테 심사 받는다고 해요. 저는 이제 마음 놓고 사실을 말할 수 있겠구나 했어요. 그런데 이근안, 이봉구, 이동구가 검사실에 따라 들어와서 제가 답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거예요. 물론 심사받으러 가기 전부터 이근안은 “가서 잘 얘기하면 공소보류를 시켜 집에 보내주지만, 쓸데없는 얘기 하거나 부인하면 장사 치르는 날인 줄 알라”고 협박을 해서 저는 검사가 묻는 말에 시인도 부인도 못 했습니다. 검사는 경찰조서의 1번부터 17번까지의 내용을 읽었고 옆에 있는 여직원이 타이프를 치기만 했어요. 그렇게 1시간 반 동안 조서를 작성하고 읽어보라는 말도 없이 지문 날인시키고는 데리고 가라고 합니다. 저는 진짜 마무리됐구나 싶었는데, 수사관들은 곧장 서울구치소로 수감시켰어요.

남영동을 나온 이후에도 매일 같이 악몽을 꾸셨다고 하셨죠?

말도 못 하죠. 서울구치소로 간 뒤, 1년여 동안은 고문후유증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잠깐 잠들었다가도 이근안 고문 장면이 떠오르면 놀라서 벌떡 일어나요. 하루 2~3시간 이상 잠들지 못했어요. 그리고 칠성판에 묶여 몽둥이로 얻어맞은 다리가 퉁퉁 부어 오르는데 그 통증을 견딜 수 없었어요. 외부진료를 받았더니 의사가 정맥에 이상이 생겨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습니다. 증상은 출소 이후에도 2년 정도 더 계속 됐어요. 그때 생각하면 지금 살아있는 건 기적이에요.

선생님께서 재심을 준비하던 1999년 10월 이근안이 자수했어요. 그때 이근안과 대질심문했던 기억 나시죠?

그럼요. 이근안이 ‘함 선생님’ 하면서 들어오는데 정말이지 죽이고 싶었습니다. 대질심문하는 장면을 생각하니까…. 참 기가 막히죠. (말 속도 매우 느려짐) 겁도 났어요. 잘못되면 어쩔까 싶고, 공포에 싸인 상태였어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감정을 누르고 고문한 당사자 앞에서 제가 당한 고문을 다 말했어요. 칠성판에서 누워서 고문 받던 장면도 재현했어요. 그제야 이근안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자백하더군요.

고문 가해자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대면하셨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든 걸 밝혀내서 그자들을 처벌해야 하잖아요. (손짓하며 강하게 말함) 내가 가야 증언도 하고 그래야 처벌하지. 내가 안 가면 누가 가요?

선생님께서는 당시 고문했던 수사관 이름을 모두 기억했던 것이죠?

이근안, 이봉구, 이동구, 최평선이었어요. 당시에 수사관들이 자기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진술서 맨 아래 수사관들이 이름 사인하는 걸 본 거예요. 어떻게든 살아 나가서, 고문 받은 사실을 세상에 밝히려면 수사관들 이름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조차 모르면 무엇으로 내가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겠어요.

(함주명 부인 이춘자 선생께)

남영동으로 끌려갔을 때 이춘자 선생님은 남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셨죠?

이춘자: 83년 2월 18일에 9시에 남편이 종로5가에 볼일 있다면서 나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어요. 하루아침에 남편이 없어졌으니, 어디서 남편을 찾나 싶어서 울면서 동네를 돌아다녔어요. 4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놀라서 동네 파출소, 경찰서 찾아가서 신고했죠. 저는 남편이 교통사고가 나서 어디가 잘못된 지 알았어요. 그런데 5일 지났을 때, 오전 6시 반쯤 이근안하고 세 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어요. 시누이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시누이만 데려가고 나는 안 데려가더라고요. 들어 보니 동서, 시숙, 대구 사는 형부까지 조사받았대요. 그제야 뭐가 잘못됐구나 싶었지. 치안본부라는 데서 조사받는 것도 그때 알았어요.

지금은 편한 듯 말씀하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춘자: 무섭고 떨리죠. 시골에서 올라와서 길음동에서만 살았지. 치안본부가 뭐 하는 데인지도 전혀 몰랐어요. 시누이가 돌아와서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데에서 조사받았다 그래요. 시누이가 별일 아닐 거라고 그랬는데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났어요.

남영동을 찾아가셨죠? 어떠셨나요?

결국 남영동에 혼자 찾아갔어요. 앞에 있는 철문이 엄청나게 커서 안에 어떤 건물이 있는지도 안 보여요. 문이 얼마나 튼튼한지 손으로 두드려서는 소리도 안 나겠더라고. 그래서 방망이 같은 거로 쾅쾅 두드리니깐 문이 옆으로 열렸어요. 남자 한 명이 나와서는 “아줌마 여기 어딘지 알고 오셨냐”고 해요. 내가 “남편이 안에 있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깐 잠깐 기다리라고 해요. 한참 후에 형사가 나왔어요. “남편 좀 만나게 해달라. 뭐 땜에 그러는지 알아야겠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알 수 없으니, 집에 가라는 거야. 한 번 더 찾아갔지만 못 만났어요. 그땐 아주머니도 같이 조사받고 싶으냐고 협박해.

언제 함주명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나요? 첫 면회를 기억하시나요?

이춘자: 두 달 지난 후 남편이 서울구치소 가고 나서야 면회를 했어. 이 양반이 가슴을 움켜쥐고 나오는 거예요. 말은 없고 얼굴은 영 푸석푸석해. 고문받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그때는 고문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어요. 이 양반이 날 보더니 그저 울기만 해요. “뭘 잘못해서 여기 끌려왔냐”고 물으니 “난 하나도 잘못한 거 없다”고만 해요. 그때는 간첩이 됐다는 말도 안 했어요. 그저 “나는 억울하고 변호사 선임해서 재판하면 무죄로 나갈 수 있다”고만 말해요. 그랬던 사람이 글쎄, 16년 후에 나왔어요.

이후에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본 적 있으세요?

이춘자: 남영역이나 숙대 지나갈 때면 고개를 돌려요.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싶고 믿기지 않아요. 지금 남편이 몸 아픈 것도 고문 후유증 아닌가 싶어요. 특별한 증상 없이 그냥 온몸이 아프대요.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어딘지를 콕 집어서 말을 못 하고, 힘들어하기만 해요. 어디가 부러지거나 한 가지가 특별히 안 좋은 것도 아니고요. 거기 다녀온 이후로 당뇨도 생겼어요. 억울하고 분통 터지니까요. 물론 나이가 많은 것도 있지만, 이렇게 바짝 뼈만 남기 어디 쉽나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이에요. (옆에서 듣고 있던 함주명 선생님 한숨을 쉼) 누워 있으면 영 못 볼 상태예요. 그래도 오늘은 인터뷰한다고 아침부터 머리 감고, 옷 챙겨 입고 앉아 있어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거지.

16년 감옥살이 동안 어떻게 사셨어요? 어떤 고통이 크셨어요?

이춘자: 이 양반은 애들 크는 모습도 전혀 보지 못하고, 애들이나 나는 간첩 자식, 마누라로 살았어요. 동네에서 우리 가족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도 않고 쉬쉬했어요. 그 경계의 눈초리는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울먹) 지금은 신당동을 떠났지만, 그때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했어요. (안경을 벗고 눈물 훔침) 그때 생각하면 말을 못 해요.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애타던 가족들이 참 많았잖아요? 그 가족들은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는가요?

이춘자: 죄도 없이 멀쩡한 사람들 잡아다가 간첩을 만들어 놓고 16년간 감옥에 살게 했다는 사실을 국민들도 알아야 해요. 물론 무죄를 받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 아니에요. 애타는 심정으로 16년 기다렸더니 이런 기회도 오네요. 예전에 남편한테 “당신이 참 억울하게 살았지만 그래도 다들 기억해 준다니 천만다행이다”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남영동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조성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고문실을 그대로 보존한다면 거기서 살아남은 제 역할이 필요하겠네요. 나 아니면 누가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증언하나요. 욕심대로라면 함주명이라는 인간이 그곳에서 이근안에게 모질게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모두 드러내는 장소가 되길 바라죠. 이제는 남영동에 한번 가보고 싶기도 해요. 내가 직접 그 곳에서 증언해주는 것이 뭐라도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 기운을 내서라도 갈게요.

‘함주명’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진실을 밝힌 산 증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