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프랑스사를 전공하고 학위를 받은 신동규 교수는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프랑스의 극우역사정치와 매우 유사함을 발견하고 이 내용을 강연에 다루었습니다.

Ⅰ. 강연 요약

프랑스 우파의 역사와 극우의 형성

좌파·우파라는 용어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왕권 제한 여부를 표결할 때, 왕권 유지파가 의장석 오른쪽에, 왕권 제한파가 왼쪽에 앉으면서 생겨났다.

역사가 르네 레몽(현 프랑스 정치사 분야의 주류해석 토대를 만든 인물)은 프랑스 우파를 세가지 전통으로 구분했다. 왕권 존속을 주장한 왕당파('보수'의 어원), 공화주의 세력과 연대하면서도 강력한 권위를 요구한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트주의, 1830년 7월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이끈 오를레앙파가 그것이다. 이후 왕정복고·입헌군주제·제2제정·제3공화정을 거치며 이 세 전통이 뒤섞여 프랑스 우파의 계보를 이뤘다는 것이 레몽의 설명이다.

문제는 파시즘의 자리다. 레몽 등 주류 학자들은 파시즘을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이질적 사상으로, 프랑스는 공화주의 전통 덕에 면역이었다고 본다. 반면 이스라엘계 학자 제브 스테른헬은 파시즘의 뿌리가 프랑스에 있다고 반박한다. 근거는 조르주 소렐(무솔리니가 파시즘 이론의 최대 영향자로 지목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과, 그의 제자 에두아르 베르트가 민족주의자 샤를 모라스와 함께 1910년대 초 결성한 푸르동 서클이다. '파시즘'이라는 명칭도 없던 이 시기에 이미 민족주의와 혁명적 좌파 사상의 결합, 즉 부르주아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솔리니 파시즘당의 상징 파스케스 역시 원래 프랑스혁명에서 국민 주권의 단결을 뜻하던 문양이 이탈리아로 전해진 것이라는 점도 이런 연결성을 뒷받침한다.

결론적으로 좌파는 대의민주주의 확대를, 온건 우파는 그 유지를, 극우는 대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며 권위주의·왕정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공화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파시즘을 프랑스 우파의 '네 번째 전통'으로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첨예한 쟁점이다.

전후 프랑스 극우의 메타정치와 역사부정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은 홀로코스트라는 참상이 드러나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과거처럼 선거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직접 장악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극우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하게 되는데, 알랭 드 브누아는 이를 '메타정치'라는 개념으로 체계화했다. 메타정치란 정치권력을 곧바로 획득하려 하기보다, 문화와 지식, 역사 해석의 영역에서 사회의 상식 자체를 바꾸어 놓으면 정치권력은 자연히 뒤따라온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메타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역사라고 본 대표적인 인물 호베르 브라지야크의 처남 모리스 바르데쉬다.
호베르 브라지야크는 친나치 언론 활동을 이유로 전후 처형되었고, 그의 죽음은 프랑스 극우 진영 내부에서 순교자 서사로 재생산되었다. 바르데슈는 처남의 처형에 자극받아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등의 저작을 통해 스스로를 공개적으로 "파시스트"라 선언하며 파시즘의 정치적 정당성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스실이 대량학살 시설이 아니라 방역시설이었으며 학살 규모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단순한 역사적 논쟁이 아니라 파시즘이 짊어진 도덕적 책임을 지워버리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바르데슈가 열어놓은 이러한 논리는 이후 폴 라시니에, 프랑수아 뒤프라, 로베르 포리송 등에 의해 계승·확장되었으며, 이들은 스스로의 주장을 '역사수정주의'라 칭하면서 마치 객관적인 학문적 재검토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나 실질적 목적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데 있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는 『기억의 암살자』를 통해 이들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고, 앙리 루소는 이것이 결코 '수정주의'가 아니라 부정주의(Négationnisme)'라고 명명하며, 이는 역사 해석상의 견해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임을 분명히 했다.

박유하의 일본 위안부 문제
프랑스에서 형성된 역사 부정주의가 한 국가 안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설명한다. 1970년대 후반 프랑스의 홀로코스트 부정주의자들은 학술지와 국제회의를 통해 서로 교류하며 역사 수정주의 담론을 확산시켰고, 이러한 논의는 1990년대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세력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본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난징대학살 등을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며,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같은 단체들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가 단순히 역사 해석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전쟁 책임을 상대화하고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려는 메타정치 전략으로 발전했다. 역사 논쟁을 통해 사회의 집단 기억을 바꾸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박유하가 일본에서 연구하고 활동한 시기가 이러한 역사 수정주의 담론이 활발히 확산되던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박유하는 일본 유학과 연구를 통해 일본 학계와 지식인 사회에서 활동했으며, 『제국의 위안부』가 출간된 시기 역시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책임을 둘러싼 역사 수정주의 논쟁이 본격화된 이후였다. 이러한 시대적·지적 환경의 중첩을 확인 하면서, 『제국의 위안부』를 개별 저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본 역사 수정주의 담론이 형성된 맥락 속에서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Ⅱ. 질의응답 요약
1. AI가 역사 부정 담론을 학습하면 젊은 세대가 왜곡된 역사관을 갖게 될 위험이 있지 않은가.

민주시민교육에 참여한 대화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미 10~20대 극우화된 청년층 사이에서 '메타정치'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좌파라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자유·평등 같은 가치가 어떻게 쟁취되었는지를 가르치지 못하는 암기식 역사 교육의 한계가 있다. 여기에 AI가 문제를 심화시킨다. AI는 학습 데이터에 좌우되므로(초기 AI가 히틀러를 미화했던 사례처럼), 특정 세력이 매크로 등으로 편향된 자료를 대량 생산하면, 공인된 역사 서술 자체를 자본과 조직력으로 조작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우려다. 프랑스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비시 정부의 나치 협력은 1980년대에야 알려졌고, 시라크의 공식 사과는 2000년대에야 이루어졌다. 역사학이 발달한 프랑스조차 '부끄러운 역사'인 비시 시기 연구는 기피했고, 레지스탕스 연구에만 치중했다. 실제로 비시 연구의 권위자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국의 로버트 팩스턴이었고, 이를 조명한 것도 이스라엘계 학자 제브 스테른헬이었다. 핵심은 역사 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연도·사실의 암기가 아니라, 권리가 어떻게 쟁취되었고 그것이 없을 때 어떤 참상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교육과 인문학 연구 환경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2. 사람들은 왜 극우에 열광하는가
극우화 현상은 나름의 합리적 동원 전략에 기반한다. 파시즘, 특히 나치가 성공한 핵심 비결은 중산층의 몰락 공포를 이용한 것이었다. 나치 강령은 철저히 중산층을 겨냥했는데, 이는 좌파의 동원 논리와 대비된다. 좌파는 '평균 이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급투쟁을 통해 평균(중산층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반면, 파시스트는 이미 중산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위에서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로 대중을 동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네오 소셜리즘 이론가들이 만든 국가 주도 계획경제 시스템이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사례에서 흔히 '사회주의(공산주의)적 계획경제'로 오해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중산층 강화를 위해 설계된 파시즘의 경제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즉 계획경제라는 형식 자체가 좌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파시즘이 중산층을 포섭하기 위해 발전시킨 통치 기술이었다는 것이다.
3.불평등 심화(특히 20대의 자산시장 소외감)가 파시즘 출현의 합리적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한국 사회도 그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닌지.
파시즘의 핵심 동원 메커니즘은 "빼앗긴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욕구"다. 경제적 측면에서 중산층 붕괴가 하나의 축이라면, 사회·젠더적 측면에서는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이 오랫동안 누려온 기득권이 양성평등과 페미니즘 운동을 거치며 해체된 것이 또 다른 축이다. 자유경쟁 체제에서 여성이 학업 등 여러 영역에서 더 우수한 성과를 내는 현실과 맞물려, 20대 남성들은 "권리는 사라졌는데 의무만 남았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반페미니즘적·극우적 성향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경제적 요인이 겹친다. 주식시장 소외뿐 아니라 부동산 자산 격차 등 여러 층위의 불평등이 누적되어 있고, 경제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중산층이 하위 계층으로 추락할 위험이 크며, 사실상 중산층이 사라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강사는 이런 조건들이 지속된다면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똑똑한 정치인"이 등장해 대중을 결집시킬 경우, 파시즘적 정치 세력의 출현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본다.
4 알랭 드 브누아의 메타정치는 그람시의 문화 헤게모니 이론과 관련이 있는가.
알랭 드 브누아는 스스로를 '그람시 우파'라 칭하며, 좌파가 문화적 헤게모니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던 그람시식 전략을 우파도 동일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동호회·독서모임·출판사 등을 통해 일상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람시·니체 연구를 바탕으로 계몽사상을 재해석하며, 대중 잡지를 통해 사상을 확산시켰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메타정치가 환경·페미니즘 같은 좌파 의제도 포섭했다는 것이다. '평등의 부정'이라는 극우적 관점에서 재해석된 극우 페미니즘·극우 환경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핵심 매개체는 『르 피가로 마가진』으로, 우파 정론지 『르 피가로』의 주간지인 이 잡지는 극우와 온건 우파를 연결하며 이민자 유입에 따른 '인구 대체' 담론을 확산시켰다. 이 모든 과정이 좌파 그람시주의를 모방한 '우파 그람시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강의에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5 알제리전쟁은 극우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당시 좌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알랭 드 브누아가 성장한 1950~60년대는 프랑스가 베트남 전쟁 패배(~1954)에 이어 알제리 전쟁(1954~1962)을 겪으며 제국으로서 쇠퇴해가던 시기였다. 이 세대는 강했던 프랑스가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는 극우 세력은 테러까지 감행해 프랑스 본토에 계엄령이 선포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이 시기 알제리 독립 문제는 좌파(반제국주의·독립 지지)와 극우(제국 유지) 세력을 가르는 핵심 쟁점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968년 68운동에 이르러 좌파와 극우가 동일한 대상, 즉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공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직명을 가리면 좌우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좌파(트로츠키주의자·마오이스트 계열)가 만든 "나는 참여한다... 그들이 이익을 쟁취한다"는 포스터는 드골이 해방 직후 약속했던 국민 참여 확대가 20년간 실현되지 않았음을 비판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극우는 "나는 투표한다... 그들이 이익을 챙긴다, 투표 거부"라는 식으로 사실상 이를 미러링하여 동일하게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비판했다.
양측 모두 구호는 '체제 전복'이었고, 드골에 대한 강한 반감도 공유했다. 좌우가 서로 경쟁하고 충돌하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의 대상은 놀랍도록 일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