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17일 저녁, 서울 창덕궁 옆 진실의힘에서 ‘아주 특별한 탱고, 피아졸라’라는 주제의 음악여행이 펼쳐지고 있다. ‘유서 대필 사건’으로 23년간 고통을 받다가 지난 2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강기훈(오른쪽)씨가 이날 클래식 기타를 연주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벚꽃이 지던 날, 탱고가 피어났다. 강기훈씨의 그늘진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4월17일 저녁, 서울 창덕궁 옆 (재)진실의힘에서는 애수 어린 탱고 선율과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음악을 통한 치유의 공동체 ‘진실의힘 음악여행’, 이날의 주제는 ‘아주 특별한 탱고, 피아졸라’였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의 비극을 애도하는 묵념에 이어 음악이 시작됐다.

중2 때 독학으로 익힌 클래식 기타

강기훈씨가 클래식 기타, 은혜공동체의 정현아씨가 플루트를 맡아 피아졸라의 <까페 1930>을 연주했다. 아픈 세월을 탱고 리듬에 실어서 이겨낸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음악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았다. 손인달씨는 바이올린으로 <탱고 연습곡>을, 김레베카씨는 멋진 보컬로 <바친의 꼬마>를 들려줬다. 강기훈씨의 기타 실력은 수준급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음악에 담긴 강기훈씨의 소탈한 마음이었다.

세상의 거짓과 외롭게 맞설 때 음악은 그의 벗이었다. 그는 브람스의 우수 어린 선율을 사랑했고, 말러의 고뇌와 절규에 공감했다. ‘유서 대필 조작’의 황당한 제물이 된 채 견딘 23년,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잊으려고 했지만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이었습니다. 의식하지 않는 새 슬며시 찾아와 제 마음을 흔드는 과거의 기억들은 지난 일이 아니라 ‘현재’였으며, 눈을 뜬 채로 겪는 ‘악몽’ 자체였습니다.”(2014년 1월16일, 강기훈의 최후진술 중에서)

이 기나긴 세월, 음악이 없었다면 그는 정신을 놓아버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 모른다. 가장 큰 위안은 중3 때부터 독학으로 익힌 클래식 기타였다. 재심 개시 결정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에, 검찰의 궤변이 눈에 어른거리는 분노의 시간에, 서울고법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혼자 남은 텅 빈 시간에, 그는 어김없이 기타를 손에 들었다.

진실의힘을 알게 된 건 강기훈씨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일하던 1989년 무렵, 타이핑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문서 정리를 도와주다가 깜짝 놀랐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조작간첩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것. 그가 타이핑하던 문서는 박정희·전두환 시절 갑자기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된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유서 대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뒤, 대전교도소에서 문서 속의 그들을 만났다. 세월이 흘러 이 어른들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고, 배상금을 모아 진실의힘을 만들었고, 자신의 고통으로 우리 시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도움과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났다. 강기훈씨는 암 투병을 시작한 이래 진실의힘에서 마음의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지난 2월13일 서울고법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그는 진실의힘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며 기타를 연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날 음악여행에 ‘특별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게 강기훈씨는 곤혹스러웠다. 진실의힘은 강기훈씨를 특별하게 대한 적이 없고, 강기훈씨의 제안도 전혀 특별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기훈씨는 지난 세월 혼자 고통스러웠던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선후배, 가족들의 삶은 하루도 ‘유서 대필’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명예롭지 못한 망자에 대한 부채감, 하루 한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저에 대한 연민, 처절하고 지옥 같았던 시간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 이 모든 게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놓았습니다.”(2014년 1월16일, 강기훈의 최후진술 중에서)

하루도 자유롭지 못한 세월, 혼자가 아니었다

이날 음악은 살아남아줘서 고맙고, 험악한 이 시대를 함께 걸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특별히 누가 누구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라 아무 말 없이 함께 느끼는 감사였다. 따라서 ‘특별한’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특별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은혜공동체 정현아씨가 정성스런 해설로 피아졸라 작곡 <천사의 죽음>을 소개했다. 강기훈씨는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이 곡을 듣고 탱고에 매료됐다고 한다.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를 수놓은 <아버지, 안녕> 등 주옥같은 탱고 음악이 이어졌다. 이날 음악여행의 백미는 마지막 곡 <바친의 꼬마>였다. 김레베카씨는 아마추어라곤 믿기지 않는 발군의 노래 실력을 보여주었고, 손인달씨는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번갈아 연주하며 기염을 토했고, 해설을 맡은 정현아씨는 플루트에 이어 피아노까지 1인3역을 거뜬히 해냈다. 강기훈씨의 기타는 한결 부드럽고 유연해져 있었다.

수줍고 예민한 강기훈씨는 혼자 음악여행의 주인공 취급을 받는 걸 몹시 꺼렸다. 기꺼이 마음을 내고 바쁜 시간을 쪼개 연습에 참여한 모든 연주자가 주인공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함께 음악을 느끼고 박수를 보낸 40여 명의 참가자들도 똑같은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대법원에서 이른 시일 내에 재판을 열어 강기훈씨의 무죄를 확정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암이 재발해 투병 중인 그가 괴로운 시간을 잘 이겨내주기를, 건강한 얼굴로 음악과 우정을 오래오래 나눌 수 있기를 모두 염원했다.

이른 시일 내에 무죄가 확정되기를

“사람들에겐 누구나 풍류가 있지요. 강기훈씨가 그동안 풍류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 같은데, 앞으로 더 많이 즐기고 함께 놀 수 있길 바랍니다.”(강기훈의 오랜 친구 염규홍씨) “강기훈씨 성격 까칠한 거 다 아시죠? (웃음) 오늘 연주하는 모습 보니까 잘생긴 것 같기도 하네요. (폭소) 음악 하나 더 청해 들읍시다. (박수)”(강기훈의 ‘주치의’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기훈씨는 기타를 다시 꺼내 앙코르곡을 연주했다. 알폰소 몬테스 작곡 <이별의 전주곡>이라고 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피어난 꽃은 또 다른 상처들을 조용히 어루만져주고 있었다. 뒤풀이에서는 피아졸라의 <고독>을 함께 들었다. 우리 살아 있는 날의 아름다운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이채훈 전 MBC PD·재단법인 진실의힘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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