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남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요"

-허정오-

지난 2022년 10월 형제복지원 사건은 세상에 알려진 후 35년만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인정받았습니다. 불법 구금과 강제 노역, 학습과 사회성이 성장할 기회 등이 박탈된 채 수용되었던 피해자들은 형제복지원을 나온 후 에도 형제복지원에서의 경험이 그들의 인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큰 이유가 되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현재 진행중임을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봅니다.

입소 경위

저는 부산 사하구 신평에서 살았고 3남 1녀중 막내아들입니다. 어릴 때 2층 집에서 살더 기억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나가셨다가 부산역에서 저를 잃어버렸답니다. 신평에서 부산역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부산역 대합실에서 어른들하고 같이 앉아서 TV를 보다가 완장을 찬 사람들에 의해 형제복지원 차에 태워졌습니다.

강제노동

주례동 형제복지원 초기에는 건물이 단층이었습니다. 한 소대가 100명 좀 넘었던 것 같은데, 슬레이트 지붕 건물 두 동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아동소대가 따로 있지 않아서 한쪽에는 아동들이 자고, 다른 쪽에는 어른들이 잤습니다. 취침할 때 아이들은 발과 머리가 지그재그가 되게 옆으로 누워 잤습니다. 조장이 그 위를 뛰어다니며 발이 빠지는 애를 골라서 빳다 때리고 원산폭격을 시켰습니다. 점점 아이들이 많아지니까 나중에 아동소대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대 구분이 시작된 거는 건물을 확장하면서인데 1980년대 들어서 형제복지원이 확 커졌습니다. 원생들이 계속 건물을 지어서 2층을 올렸습니다. 6시인가 7시인가 일어나서 점호하고, 밥 먹고, 일을 했습니다. 건물 지을 때는 큰 바위를 깨서 자갈로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큰 바위는 양쪽에 구멍을 내서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깨진 바위 중간, 중간에 쇠말뚝을 박으면 돌이 반으로 갈라집니다. 함마로 내리쳐서 더 잘게 부순 돌을 원생들이 들고 운동장 공터에 갖다 놓으면 거기 있는 아이들은 양쪽 뒤발꿈치로 돌을 잡아 쇠망치로 잘게 부숴서 발로 밀고, 그 앞에 있는 아이는 그 자갈을 삽으로 떠서 마대에 담아 줍니다. 그걸 다른 아이 어깨에 매주면 마대를 날라서 소대 건물 짓는 현장에 갖다 주는 식입니다. 저도 어렸지만 그 일을 했습니다. 돌깨는 옆에서는 흙벽돌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산에서 캐온 흙을 지푸라기와 섞어서 사각 틀에 담아주면 다른 사람이 틀 옆에 달린 누르는 쇠막대 위에 올라타서 강하게 눌러 흙벽돌을 만듭니다. 그렇게 나온 벽돌을 나무판에 차곡차곡 옮겨 담아 말리면 엄청나게 단단한 벽돌이 됩니다. 한동안 소대 건물을 짓다가 건물이 거의 다 지어졌을 때는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별별 공장이 다 있는데, 저는 낚시공장에 가서 낚시바늘에 줄을 감았습니다. 시간 내에 못하면 얻어 터져야 했습니다. 컵에 장식으로 쓰는 종이우산도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건물 짓는 일에 비하면 공장일은 수월한 편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이 자체 발행한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에 따르면 건물 34동을 모두 수용자들의 강제노동으로 건설했다.

식사

1970년대 형제복지원에서는 하루 세끼를 먹었지만, 까만 꽁보리밥에 썩은 김치, 된장 물인지 흑탕물인지 모를 된장국, 엄청나게 짠 정어리 젓이 나왔습니다. 양이 부족했고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럴 때 흙을 먹었습니다. 산에서 공사를 하다 보면 무덤에서 아주 붉고 부드러운 흙이 나오는데 쫀득쫀득했습니다. 형들은 “죽은 시체에서 진액이 흘러나와서 흙에 섞여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걸 봉지나 그릇 같은데 담아 햇빛에 말리면 딱딱하게 굳는데 마치 과자 같이 바삭바삭한 맛이 있었습니다. 그걸 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실패한 도망

어릴 때부터 형제원에 있어서 그랬는지 저는 거기서 ‘왈왈이’[1]가 됐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형이 같이 도망가자고 해서 몇 명이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습니다. 무작정 달리고 달렸습니다. 산을 몇 개나 넘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달렸는데, 비까지 와서 몸이 쫄딱 젖었습니다. 근처 산에는 촛불 켜놓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거기 있는 먹을 것으로 며칠을 지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아줌마가 우리가 안돼 보였는지 자기 집으로 불러 라면을 끓여 주셨습니다. 라면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왔고 개금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다시 가면 맞아 죽는다고 형제복지원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빌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곧 형제복지원 차가 와서 타야 했습니다. 차 뒷문 창살에 매달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그때 기억이 납니다. 개가 죽기 직전에 끌려가는 느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대장실로 끌려갔습니다. 중대장이 양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빨간색 야구방망이를 든 채 우리를 쳐다보며 “엎드려!”했습니다. 빳다 50대를 맞았고 탈출을 도운 사람들은 맞다가 기절을 했습니다. 다음 날 “나는 탈출하다 잡혀왔습니다”라고 빨간 페인트로 쓴 마대를 입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시간에 식당 입구에 서있다가 원생들이 다 들어가고 나면 그때서야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똥지게를 져야 했습니다. 각 소대 똥통에서 나오는 오물을 지게 양 끝에 담아 어깨에 메고 교회 올라가는 계단 중턱까지 갖고 갑니다. 채소 밭에 뿌리거나 키우던 가축한테 먹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다 13소대로 보내졌고, 다시 27소대로 보내졌습니다.

27소대 있을 때, 다른 아이들 2명과 소대 안 창문 위에 달린 환풍기로 다시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한 명은 나갔고, 나는 몸이 반 정도 나갔다가 허리띠에 걸려 몸부림 치다가 순찰한테 걸렸습니다. 다시 13소대로 꼬링[2]됐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28소대로 왔습니다.

개금분교

저는 1984년 개금분교 4학년으로 들어갔다가 6학년 때 퇴소했습니다. 나이와 덩치에 맞춰 분교에 보내줬습니다. 4학년 1반 59번으로 학생이 됐는데 정말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담임은 김건호 선생님. 6학년 때도 담임이라 기억합니다. 3년 동안에 한글을 배웠고 더하기, 빼기, 분수 정도까지 배운 것 같습니다. 늘 잠이 부족해서 잠을 많이 잔 것 같습니다. 수업 끝나면 소대로 가서 제식훈련 받고, 못하면 단체 기합을 받고 그러니 공부할 환경은 되지 않았습니다. 퇴소한 뒤로 개금초등학교 찾아가서 김건호 선생님을 뵀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들이 무서웠다고 하셨습니다.

조장생활

28소대 있을 때는 조장을 했습니다. 조장은 소대장이 지명합니다. 통솔력이 있어야 하고 또 힘도 있어야 합니다. 왈왈이 같은 아이들이 보통 조장을 합니다. 한 소대에 조장이 2~3명 있었는데, 몇십 명 되는 아이들을 통솔하고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제식훈련도 시키고 소대장이 지시를 하면 애들한테 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몽둥이 들고 빳따도 치고 기합도 주고 그랬습니다.

통솔하기 쉬우니 군대식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말 한마디, 빳따 한 대면 전체를 잡을 수 있습니다. “선착순”을 외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빳따만 치면 됩니다. 조장의 권한이 막강한데 소대원에게는 중대장보다 직접적으로 접하는 사람이라 조장의 영향력이 중대장보다 큽니다. 조장을 하지 않으면 내가 소대원으로 맞게 되는데, 그런 권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맞기 싫으면 무조건 때려야 합니다. 하기 싫다고 하면 내가 하던 것을 그대로 돌려받게 됩니다. 양심이 있어서 거부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폭력과 공포, 군대식 규율화 되어 있어서 아주 익숙해져 버립니다. 제가 조장일 때 저는 심하게 대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컸기 때문에 이유없이 괴롭히는 것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이유없이 괴롭히는 조장도 있습니다. 손바닥은 때려도 다른 데는 때리지 않았고 한 사람의 잘못을 연대책임 묻지는 않았습니다. 조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서 그 정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조장을 하려면 소대원을 빳따 때리고 제식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소대장들이 조장을 때리기 때문에 조장들은 소대원들을 더 때립니다. 소대원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으면 조장 목이 날아가는 것이고 그러면 다른 소대원들과 같은 처지가 되니 그렇게 안되려고 더 가혹하게 합니다. 물론 내가 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지금 다시 그 상황이 온다면 죽어도 탈출을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환경이니 탈출이 최선입니다. 어떤 소대원은 제가 심하게 때려서 팔이 부러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장으로서 위엄이 있어야 해서 내색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대원에게 무시를 당하면 안 되니, 쎈 척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잘한 것이 없으니 사과는 하고 싶습니다. 내가 살려고 한 것이고, 그런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책임은 국가와 박인근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고 권력자들의 생각으로 군대 같은 생활 환경, 시설, 규칙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불법적으로 납치해서 강제로 가둬둔 것이 첫째로 나쁘고,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소대원들을 구타하면서 군대식으로 다루도록 정한 것 역시 잘못입니다. 그런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승인하고 유지하게 해준 권력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대여섯살부터 그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생활이 익숙했고,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어떤 삶이 있는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아남기 위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그냥 살아남은 겁니다.

형제복지원 건설을 위해 필요한 돌을 수용자들이 만들고 있다.

퇴소

1986년 엄마와 큰 형이 찾으러 왔습니다. 보는 순간 엄마인 줄 알아봤습니다. 엄마를 따라 퇴소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쉽게 거기서 나오다니 허무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없는 동안 안 가본 고아원이 없을 정도로 찾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3번을 찾아갔는데 비슷한 이름은 있어도 딱 맞는 이름은 없다고 돌려보냈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왔을 때 나를 불러 얼굴을 확인을 해줬더라면 엄마를 따라 나왔을 텐데 형제복지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많이 우셨습니다. 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부모님 원망이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영도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온 뒤로 한 6개월은 집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괜히 또 잡혀갈까 봐 무서웠습니다. 매일 매일 형제복지원 꿈을 꿨습니다. 빳따를 맞거나 기합을 받는 꿈도 꿨습니다. 밖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열악한 사회적 관계

집에 돌아와 보니 저는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고 18살 어중간한 나이였습니다. 또래들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해 학교를 갈 수도 없었고,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어서 일을 하러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시내를 나가도 친구가 없었습니다. 저와 놀아줄 친구는 형제복지원에서 알았던 아이들이나 동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구두닦이나 소매치기를 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도 소매치기를 하다가 구속되어 집행유예로 나왔습니다. 한번 그렇게 되자 자꾸 엮이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모래 운반선 배를 타기도 했는데 시내에서 알게 된 형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절도죄로 실형을 살았습니다. 출소 후 웨이터 생활, 룸살롱 지배인, 스탠드바 DJ, 밤무대 가수 등을 하며 살았습니다.

놀지 않고 늘 일을 했지만 잘못된 선에서 출발한 인생이 바로잡아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고졸 내지 대졸의 학력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의 벽이 얼마나 높은 지 내 환경으로는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절망이 컸습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원망했고 자존감은 한없이 무너졌습니다.

진실규명

인터넷을 배우고 나서 “형제복지원”을 찾아봤는데 인터넷 까페가 있었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가입을 하고 한종선을 만났습니다. 서로 연락을 하다가 지금의 피해생존자모임을 만들고 까페 관리를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종선이는 국회 앞에서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하겠다고 했고 저는 돕기로 했습니다. 인터뷰 등 실명과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직업이 있으니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하지만 모임에는 꼭 참석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나는 늘 종선이의 입장을 존중합니다. 종선이 덕분에 진실규명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억울한 일

저는 지금도 형제복지원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합니다. 거기서 얻어맞고 기합 받고 고통받은 육체적인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고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억울한 것은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으로 학교를 못 다니거나 친구를 못 사귄 것이 아니라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것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나 친구를 사귈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합니다. 정상적으로 살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 지 모르지만, 내 인생의 기회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 가장 분통 터지는 일입니다. 내 또래들이 학교 다닐 때 나는 형제복지원에서 기합을 받고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또래들이 고등학교 갈 때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면서 그런 친구들만 만나다 군대도 못 갔습니다. 나이에 맞는 학교를 다니며 진학을 하고, 재미난 친구들을 사귀고, 공무원이 되거나 회사원이 됐을 지도 모를 가능성이 아예 없어진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노력해서 원하는 인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억울합니다. 아내는 제가 정상적으로 컸으면 머리가 똑똑하니 뭐가 돼도 됐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좋은 사람입니다. 아내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저같이 키우지 말자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습니다. 딸아이와는 사이를 좋게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우리들의 사진첩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은 책이나 글로 나와 있지만 우리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피해생존자들의 얼굴을 내보이고 싶습니다. ‘내가 형제복지원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남았다.’ 당당하게 말하고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피해자들 얼굴을 다 찍어서 사진집도 내고 사진전도 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1] 힘 좀 쓰는 아이들을 이렇게 부름

[2] 아동소대에서 잘못을 한 경우 잘못한 사람을 벌주기 위해 성인 소대로 보내 못 살게 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