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함에 뿌리내리지 않는 사회를 위해"

조재성(고려대학교 사학과)

무력함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이 아닐까. 삶의 가장 큰 위기는 무력함에서 찾아옵니다. 다가온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거나 설령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극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 인간의 삶은 얼어붙습니다. 끝을 찾을 수 없는 억울함과 허탈함 속에서 개인은 한없이 작아질 뿐입니다. 원인 모를 고통 앞에서 이유라도 찾고 싶어 하는 행동은 무력함을 피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요.

「진실의 힘」 자원활동을 통해 마주한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분들의 삶은 그야말로 무력에 맞서는 투쟁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끌려가 형용할 수 없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사실과는 다른 진술서를 작성해야만 했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들은 삶은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조작된 것이죠. 끊임없이 무고함을 외쳐도 소용없었습니다. 국가는 그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였기에 수사기관도, 사법기관도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교도소에 수감되어 결국 ‘범죄자’가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을 때, 그 허탈함과 무력함은 가히 형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무력함은 출소한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사법의 언어로 규정된 배제에 이어, 일상의 언어로 다가온 차별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명칭은 ‘빨갱이’, ‘간첩’이었습니다. 억울함을 표현해봐야 재판을 통해 범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평생을 살던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고, 가족이 해체되고, 개인이 이루어 왔던 모든 것들을 부정당했던 일상 속에서 그들은 다시금 무력함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감히 누가 쉽사리 그들의 삶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자원활동은 그들의 삶의 궤적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저는 지난 6개월간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인 박동운 선생님, 임봉택 선생님, 정삼근 선생님 및 송씨 일가 사건 등의 사건기록을 정리하고 파일로 저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쉽사리 접할 수 없던 자료를 정리하면서 피해자분들이 겪었던 국가폭력의 흐름을 좇을 수 있었습니다. 피해자분들이 처음 기소되었던 순간부터 진술서의 내용 및 최종 판결문, 그리고 판결 이후 가려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진상규명이 진행된 과정까지를 문서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담담하게 들려주는 기록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할 판결문이 감정적·비논리적으로 한 개인을 배격했던 불편한 현실 앞에서, 입에 담지 못할 폭력으로 무고한 개인을 범죄자로 조작했던 불운한 역사 앞에서, 피해자분들이 감내했던 무력함과 국가 사법절차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 외에도 현대사에 상흔처럼 남아있는 국가폭력 사건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랑인으로 호명되어 사회의 자장 밖으로 강제 격리된 피해자들, 재사회화라는 미명 아래에서 노동 착취에 내몰린 피해자들, 그들은 모두 우리 사회 한 부분에서 함께 살아가던 구성원들이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을 포함한 국가폭력 사건들의 자료를 읽어가면서 유난히 문서의 날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재심을 포함한 진상규명은 최근에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저의 성장기 전부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피해자분들은 무력함을 이겨내기 위한 투쟁을 이어왔던 것이죠. 그들의 삶의 궤적을 마주하면서, 이제야 사건을 공부했다는 늦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국가폭력 사건 해결은 일반적인 사건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닙니다. 사건의 주체인 국가를 심판하는 것은 법인데, 그 법을 주조하고 권한을 부여한 주체가 역설적으로 국가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한 개인이 국가를 상대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일입니다. 공정한 집행자이자 공익 그 자체로 여겨지는 국가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거대하고 강력한 조직인 국가에 비해 개인은 무력해지기 쉽습니다. 특히, 국가는 공동체의 공식적인 역사를 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기에, 이미 국가는 공식적 역사서술 과정에서 국가폭력 피해자를 불법을 저지른 범죄자로 규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공동체가 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결정하며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감추기도 합니다. 국가와 개인의 기울어진 위치는 불평등을 낳고, 시간의 연대기 속에서 소외당한 개인들은 이렇게 무기력해집니다.

그럼에도 피해자분들이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던 동력, 그것이 바로 ‘진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본질은 흘러간 시간 자체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삶의 궤적에서 의미를 발굴하고 그것을 다시 시간의 흐름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폭력보다 강했던 인간의 삶이 꼭 쥐고 놓지 않았던 ‘진실의 힘’은 조작된 사실이 애써 가렸던 진실이 세상으로 드러나도록 추동하는 동력이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분들이 무죄 판결을 받으며 불명예를 스스로 벗어내셨듯 말입니다.

지난 6개월간, 사건과 함께 호흡하며 진실을 향해 나아간 이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은 제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일까요. 아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기에 무엇이 옳다는 가치판단을 쉬이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는 명제가 진정 빛나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의 어려움에 눈길을 포개고, 공정하지 않은 권력에 의문을 던지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의 힘」에서 얻은 배움을 바탕으로,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행동하는 지성을 추구하며,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무력함에 기꺼이 반문하는 시각을 지니고 뚜벅뚜벅 나아가겠습니다.